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밀씨 Sep 26. 2022

결정은 “봐서” 할게요

-알고 나면 보이는 충청어 회화 시리즈 2


지난번에 충청도식 어법에 관한 충청도에선 '저기'한 걸로 다 통한다를 올리고 나서 주변에서 재밌고 공감된다는 반응이 꽤 많았다. 그래서 오늘은 충청도에 살면서 많이 듣게 되는 말, 그 두 번째 시리즈로 “봐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 내일 언제 만날까?"

"봐서......"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땐 숨이 탁 막혔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나는 부모님이 ‘찐경상도’ 분들이라 ‘예, 아니오’에 익숙하다. 그러니 “봐서”라며 당장의 결정을 미루는 말은 나랑 만나기 싫다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봐서”라는 이 짧은 두 글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오해가 풀린다. 이 말에는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정확한 건 그때 가서 정하는 게 좋겠어. 미리 정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너한테 미안하니까.’라는 엄청난 배려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럴 때 “그러지 말고 내일 몇 시에 만날지 이 자리에서 확실히 정하자.”라고 나오면 충청도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마도 ‘아니, 뭘 그렇게까지 지금 정하라고…거참 빡빡하군.’이라고 생각하며 진땀을 뺄 것이다.



다음의 대화를 예로 좀 더 들어보겠다.


A: “우리 피자 먹을까, 치킨 먹을까?”

B: “(뭐? 이런 어려운 걸 여지없이 바로 결정하라구?) 음, 아무거나, 네가 먹고 싶은 걸로.”

A: “그래? 그럼 우리 피자 먹자.”

B: “(엇, 또 훅 들어오네. 아직 난 고민해보지 못했는데) 음, 생각해보니까 피자는 어제저녁에 먹었는데…”

A: “아, 그래? 그럼 치킨 먹을까?”

B: “(나 때문에 A가 피자를 먹고 싶었다가 치킨으로 바꾸는 건 영 미안한데) 아니, 뭐, 피자 먹어도 나는 상관없어.”

A: “어쩌라고?!”


실은 여기서 A는 나였다. 나는 본래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거침이 없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스타일이라 학창 시절부터 학급이나 동아리에서 리더 역할을 도맡았다. 중요한 일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약속 잡는 일, 일적으로 누군가를 추천하거나 소개팅을 주선하는 사소한 일도 언제나 솔선수범. 이처럼 눈앞의 몇 가지 조건만 가지고 쉽게 결정하게 되면 결과는 ‘모 아니면 도’다. 잘되면 아주 좋은 것이나, 못 되면 심하게 낭패다. 잘됐을 땐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의기양양하나, 섣부른 판단이 부른 대참사는 끙끙 속앓이를 하며 뒷수습하기 바쁘다. 그리고 지울 수 없는 ‘흑역사’를 남긴다.


충청도에서 8년간 지내면서 이곳의 공기와 날씨가 나를 묘하게 바뀌게 하는 것인지, 나는 언제부터인가 무언가를 단번에 결정하지 않고 일단 곰곰이 생각해보는 습관이 생겨났다. 나 혼자 성급히 판단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도 물어보고, 그 뒤에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경우의 수를 (조금이지만) 따져본다. 결정을 미루는 것이 마냥 답답한 일이 아니라 꼭 필요한 때도 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서울에서 친구들이 “우리 언제 볼까?”라고 물어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봐서”라고 대답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래곤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딸아이 앞에 서면 여전히 수행의 길이 멀다. 여기서 유년 시절을 쭉 보내고 있는 아이는 친구들이 "이따가 나랑 놀 수 있어?"라고 물어오면, "그래"나 "안 돼"가 아니라, "되면."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서로가 놀 수 있단 걸 확인한 뒤에도 만나기 직전까지 몇 번이나 체크를 한다.

아이가 놀이공원으로 현장학습을 가기 일주일 전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타고 싶은 놀이기구 3개를 정하라고 했단다. 그런데 몇날 며칠이 지나도 아이들끼리 뭘 타고 싶은지 얘기가 없었다. 현장학습 가기 전날, 아침 등굣길에 아이에게 내가 물었다.


“내일 드디어 현장학습이네! 오늘은 뭐 탈지 애들이랑 정하겠지?”

그랬더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대꾸했다.

“아니지~ 내일 놀이공원 가서 하는 거지!”

“뭐? 내일 가서 정한다고?”

“어~ 내일 가 봐야 알지, 엄만 그걸 어떻게 미리 정해?”


매사에 ‘정하기 좋아하는 내게 ‘봐서 길은 아직도 멀고도 멀다. 물론 아무 때나 결정을 미루고 '봐서' 남발해야 한다는  절대 아니다. 이곳에서도 정말 원하는 것이 있을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 치킨!”이라고 정해버려야  편하게   있다. 그때그때 ‘봐가면서충청도식과 경상도식 사고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삶이 균형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올해도 추석에 아무 데도 안 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