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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Oct 25. 2024

 서로를 모른다. 끝내. 기필코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엔 타인의 마음 안에 나와 같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는 잠바를 뒤로 저치고 힘껏 달리면, 바람도 세상도 내 것 같았다. 기쁘거나 슬픈 일 앞에선 누구도 내 맘 같지 않을 거라 여겼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속절없이 가는 시간을 버티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시간이 생각나는 글을 만났다. 영화로 먼저 만났었는데 우리의 인연이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 보다. 이언 매큐언의 <폭로>, 영화 제목은 <어톤먼트>. 너무 밝고 선명했던 두 주인공의 뚜렷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었지. 아직도 두 사람은 서로가 만나기로 약속한 그곳에서 행복을 그리며 살고 있을 듯한 영화였다.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호기심은 또 다른 호기심을 낳았다. 다른 사람들도 정말 그녀처럼 살아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세실리아는 브라이어니가 그렇듯이 자기 자신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일까? 세실리아가 된다는 것은 브라이어니가 되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경험일까? 언니도 부서지는 파도 뒤에 진짜 자기를 숨기고 있을까? 그리고 손가락을 얼굴 가까이 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봤을까? 아버지나 베티, 하드먼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십억 명의 사람들이 이십억 개의 목소리와 하나같이 중요하다고 아우성치는 이십억 개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곳이었다. <폭로, 이언 매큐언, 61페이지>


브라이어니는 열세 살이다. 특별한 줄 알았던 자신이 사실은 전혀 특별할 수 없는 세상에 속한 한 사람임을 깨닫는 중이다. 모두가 인형처럼 자신에게 필요한 역할을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들 역시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짜 자기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자신을 소유한 사람들이란 사실이 놀랍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진 못한다. 아직은 그녀 이루는 작은 세계의 힘이 막강하다. 그녀에겐 더 많은 아픔과 실패를 겪어야 할 미래가 있었다. 



인간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몰이해가 불행을 불렀다.(같은 책, 67페이지)


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버린 건가? 손가락이 베어 쓰라리고 아플 땐 사소한 충돌로 무릎이나 팔꿈치가 아프다는 아이를 무심하게 넘기게 된다. 나와 똑같이 아파하고 있음을 알지 못 한 체. 누군가와 틀어졌을 때도 그랬다. 그 때문에 상처받은 내 마음만 보였으니깐, 상대도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끝내 알지 못할 테다. sns상 멋져 보이는 일상으로 가득한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아프고 슬프고 때때로 좌절하는 일상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의 속성은 결국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타인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모두가 알 게 되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불행들도 사라질까? 어쩌면 우린 끝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몰이해가 가져오는 건 불행만이 아니니까. 거기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퍼져나가 다양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이야기를 먹고사는 인간에게 서로에 대한 몰이해는 살아가는 힘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 것 같다.  우린 행복 없이도, 그에 맞먹는 불행 없이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약하디 약한 존재가 아닌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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