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둘러보면, 아픈 사람들 천지다. 막내 언니는 두 번이나 디스크 때문에 입원을 했고, 남편 역시 큰 사고로 두 다리가 상처투성이다. 지난해 시부모님은 각종 검사와 치료를 위해 한 달에 두세 번씩 서울 병원을 오가야 했고, 오십견과 디스크로 고생 중인 친구도 있고 친구의 남편들 역시 어려운 고비에 직면하다가 넘기기를 반복한다. 나는 청력이 약해져 보청기를 끼다가 작년에 청각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평범하게 혹은 자연스럽게 듣고 답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다시는 그런 날과 조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몸은 급격한 사고로 와해되기도 하고, 커다란 모래시계에서 빠져나가는 작은 모래알갱이처럼 서서히 무너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삶을 바꾸고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해지고 더 이상 혼자 사는 삶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50세의 생일로부터 29일이 지나던 날, 자전거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 앞바퀴 살에 나뭇가지가 걸려 노면으로 처박혔고, 얼굴은 뭉겨지고 5번과 6번 경추는 부서지고 말았다. 그전까지 누구보다 건강하고 자기 근육을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이다. 2003년의 사고 이후 202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와해된 몸으로 자기 삶을 살았다. 책의 처음 그녀가 자기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기술해 논 부분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살까? 였다. 몸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고장난 신경은 원인 모를 통증을 시도 때도 없이 선물했고, 마약성 진통제 없이 버티기는 불가능했다. 지속적인 통증과 마비, 온전한 곳은 그녀의 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박한 고통, 망가져버린 몸뚱이와 무너져버린 삶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써봐도, 나는 그녀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안타깝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일 때나 흥미롭다.
고통의 천분의 일조차 느낄 수 없는 나는 다만, 그럼에도 삶을 이어갔던 그녀의 고백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혹은 보잘것없는 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뿐이다. 그녀보다 한 살 많았던 그녀의 오빠 제프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몸이 서서히 마비되는 희귀병을 앓다가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사고로 또 다른 한 사람은 병으로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니,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건가 싶기도 했고 이 기막힌 우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작가 역시 제프의 삶과 고통을 관찰하는 방관인에 머물다가 그와 닮은 삶을 살게 돼서야 그의 아픔과 그가 감당해내야 했던 삶의 무게가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자기 손으로 휴지 한 장조차 움직일 수 없는 삶, 참아지지 않은 장운동으로 겪어야 하는 끔찍한 부끄러움까지. 제프가 느꼈을 수치심과 좌절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지만, 그녀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기록 했다. 세세하고 꼼꼼하게 자기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밖으로 들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문장들이 친절하진 않았다. 표현은 거칠었고 감정은 메말라 있었다. 쉽게 읽을 수 없도록 휘둘러진 글들을 따라가기 쉽지 않았고, '성'정체성을 고민했던 그녀의 삶과 언제까지나 존재 자체로 인정받길 원했던 그녀의 복잡한 마음들은 너무 작고 좁고 단조롭기만 한 나의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동성애인과 섹스를 하며 느끼는 쾌감과 언제까지나 그것을 누리고 싶어 한다는 고백 앞에서 뻘쭘하니 서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내가 보였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어 논 선이라는 사실 쯤은 알고 있지만, 오랜 시간 내 안에 축적된 문화와 규범과 사회적 약속은 또 다른 성을 인정하는 일에 벽을 세웠다.
다만, 누구나 와해된 몸으로 살아갈 날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 결국 한 번쯤 겪어야 하는 수치스러운 좌절이 우리의 남은 인생 어디쯤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다. 죽음의 형태와 노년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침상에 누운 채로 혹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로 살아갈 시간들이 올 테다. 온전하고 건강한 몸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 이상화시켜 놓으면, 몸의 불편함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장애들을 비정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삶은 생명이 있는 한 삶으로 이어질 뿐. 그것을 아무리 다른 색으로 칠해 놓아도 삶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숟가락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렸던 나의 오른손이 책장조차 넘기지 못할 날이 온다 해도 살아있는 한 내 삶은 계속 흘러갈 테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남편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내 안의 세계에 빠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지라도 살아있는 한 내 삶은 이어진다. 벌레에게 먹힌 풀잎들이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꽃을 피우고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듯이 비뚤어지고 못나게 변한 몸으로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온전한 삶이다.
오히려 우리가 경계할 것은 그런 삶을 흉하게 보고, 그런 삶을 거부하고, 그런 것은 삶이 아니라고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싶고, 주어진 조건만으로도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생이 이토록 소중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글은 고백한다. 자신의 가장 보잘것없는 밑바닥까지 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이 작가만큼 나를 들어낼 용기가 나에게도 있는 건가? 영원히 감추고 싶은 비밀을 글로 써내는 마음속에 무엇이 있을까? 작가의 절절한 고백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테고, 그 고백을 들으며 위로받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보다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와해된 몸을 버텨낸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기 위해, 살기 위한 애씀이 글이 된다면, 기꺼이 읽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