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이뤄도 재미가 없을 수 있잖아요
오늘 박완서 선생님 글을 읽었어요. 산문집인데요
첫 문장이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모르겠다" 였어요. 저로선 놀라운 문장이었죠. 대작가님이시고, 수상 경력도 많으시고,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분이셨는데 말이죠.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라는 말씀을 하셨다니!! 인간은 도대체 언제 사는 재미를 느끼는 걸까요?
원하는 대로 글 쓰는 작가가 되셨고, 사회적 명성까지 쌓으셨지만, 사는 게 재밌진 않으셨나 봅니다. 저는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어요. 그렇게 된다면, 대작은 쓰지 못하더라도 사는 게 의미 있고 재밌기만 할 것 같은데 아직 그 시간에 도달하지 못한 저는 보지 못한 게 있나 봅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돼봐야 엄마 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큰애에게 잔소리했어요. 진학할 고등학교에서 내준 과제물이 있는데 지난번에 하나도 안 해서 억지로 지어서 써서 냈거든요. 두 번째부터는 잘하겠다더니 12일이 지난 후에도 안 하고 있었어요. 내내 지켜보며 스스로 하기를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지 못하고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 넌 아직 고등학생이 안 돼봤잖아. 어떤지 모르잖아. 엄마는 고등학생에 대학생까지 다 겪었고, 조카들이 겪는 것도 다 봤단 말이야. 그래서 네가 아직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 지금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할래?"
이런 식이었죠.
순둥이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을 순수히 인정하는데, 애를 또 주눅 들게 한 것 같아 그런 모습도 보기 싫더라고요.
그런데 저 역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환상만 품고 있는 건 아닐까요? 좋은 글을 써내도 인생 살맛이 안 난다고 말할 날이 저에게도 올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가보지 않은 길에는 꽃길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환상이 있죠. 그 길 역시 지금 걷고 있는 길과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걸 모르는 거죠. '아 그때 남아 있던 소개팅을 했어야 했는데, 그럼 남편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었을지도 몰라. 아 그때 선생님이 권했던 그 대학에 원서를 썼어야 했어. 그랬다면 난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텐데….' 하면서요.
가보지 못한 길이라 더 좋아 보이고 기대가 될 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이 앞이 놓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지 못하면서 저는 이미 정해진 길이 있는 것처럼 아이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졸업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 좋은 여자랑 결혼해서 좋은 인생을 사는 길을요. 열심히만 하면 좋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식으로요. 아무리 좋은 대학을 가도 좋은 직장을 가도 희로애락이 삶의 순리라는 거.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도 사는 게 재미없어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을 맞이한다는 생각을 해보니, 아이에게 공허한 말을 늘어 논 것 같아 제가 한심하게 느껴지네요.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든 설렁설렁하든 아이 인생에 사는 게 재미없는 날은 오고야 말 거예요. 그렇죠? 엄마의 잔소리는 그냥 엄마 좋으라고 늘어 논 것뿐이죠. 아이에겐 아무런 득이 될 게 없는데도. 엄마는 왜 잔소리를 늘어놔야 엄마 역할을 한 기분이 드는 걸까요? 알 수 없는 아이의 미래를 다 알고 있는 점쟁이처럼 아이를 몰아붙이며 잔소리를 했네요.
제가 이렇게 부족한 엄마입니다.
오늘따라 사는 게 재미가 없네요.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지 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