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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Jun 12. 2023

수박 반통에 만원

수박 한입에 행복이 고였다.

소 한 마리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고, 작지만 마당과 우물이 있고, 더 작지만 걸터앉아 쉴 수 있는 마루가 있었던 시골집에서 살았다. 딱 일곱 살 때 까지였기에 남아있는 기억은 몇 개 없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비슷한 집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기에 그때의 기억은 생각보다 선명하다. 한 여름 아버지가 사 온 수박을 온 가족이 모여 나눠먹었을 때, 남은 껍질을 모아 소에게 주자고 했을 때, 수박은 말 그대로 껍질뿐이었다. 커다란 양동이에 담긴 수박껍질의 초록빛이 머릿속에서 빛난다. 나는 그 초록빛 껍질도 좋아 소에게 주는 게 아까웠다. 조금 더 빨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아삭거리는 부분이 남아 있던데 하며 눈길을 보냈다. 수박을 전보다 자주 사 먹을 수 있게 된 후  먹은 수박엔 껍질뿐만 아니라 빨간 몸통까지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기억 저장고에 있는 수박은 그때 그 수박뿐이다. 야윌 대로 야위어버린 수박껍질에 가난이 묻어 있어 서글프기도 하지만, 어떤 수박도 차지 하지 못한 기억의 정중앙에 떡 하니 앉았으니, 수박으로 태어나 큰일을 해낸 샘이 아닐까 싶다. 또한 껍질마저 그냥 버려지지 않고 소 여물이 되었으니 그만하면 수박으로서 할 일은 온전히 다 마친샘이다.


둘째는 유난히 수박을 좋아한다. 한통을 사놓으면 반통을 혼자서 먹을 놈이다. 날이 조금씩 더워지자 " 엄마 수박 좀 사줘" "엄마 수박 한번 사 먹자"를 노래 가사인 마냥 매일매일 읊어대는 통에 나는 백기를 들고 수박을 사 왔다. 다행히 반통짜리 수박을 팔았다. 개당 만원. 만원이면 그래 그 녀석이 그리 노래를 부르는데 사주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다. 집으로 돌아와 자랑스럽듯이 수박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자 봐라 네가 그리 원하는 수박이다. 이 엄마가 널 위해 사온거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 드 수박 사 왔네!! 나 수박 먹을래!!"


잠깐!! 일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저녁을 먹고 먹으라고 만족지연 능력을 키워줬다.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이미 사온 수박이 어디로 달아날 일도 없으니 아이는 좋아라 한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치운 녀석이 마지막 한 숟가락을 떠먹기도 전에  "엄마 이제 수박 먹을래"한다. 나는 한쪽 눈을 흘깃했지만 순수히 수박을 잘라 주었다.


" 엄마 씨 별로 없는 쪽으로 부탁해"

눈썰미 좋은 녀석. 수박씨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걸 미리부터 봐둔 거다. 커다란 칼로 수박을 잘라 먹기 좋게 썰어주니 얼른 제입으로 가져가 베어 먹는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박 즙이 뚝뚝 떨어진다. 아이 입가엔 행복 가득이다. 덩달아 나도 먹고 싶어 진다. 녀석 입가에 가득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어서 한 조각 가져와 베어 먹었다. 아삭한 식감이 이 사이사이에 느껴진다.  맛 좋은 수박다웠다. 눈을 동 그렇게 뜨고 조금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와 이거 진짠데! 대박 맛있다."


" 거봐. 그래서 내가 수박 사 먹자고 했잖아"

사오지도 않았던 수박이 맛있을 거라 미리 알았다는 듯 자기 덕을 인정받고자 던진 둘째의 말. 나는 웃어주었다. 그리고 만 원짜리 수박으로 이만큼 행복해지면 된 건가 했다. 늦은 밤 야자에서 돌아온 큰애는 오자마자 냉장고를 들락거린다. 매일 보는 냉장고에 뭔가 먹을만한 다른 음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말이다. 그날은 평소에 보기 힘든 수박이 있었으니, 둘째만큼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녀석인데 수박을 보자마자 " 엄마 나 수박 먹고 싶어"한다. 나는 또 자못 놀란 척했다.


" 너가 웬일이야. 수박을 다 먹고 싶어 하고"

" 오늘은 왠지 수박이 먹고 싶네"


나는 다시 커다란 칼을 들고 수박을 먹기 좋게 잘라 주었다. 식탁에 앉지도 않고 부엌에 서서 수박을 먹는 큰애 입가에 또 행복이 고인다.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아삭한 수박에 반한 눈치다. 내리 커다란 4조각을 먹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다. 이제 냉장고엔 반의 반의 수박이 남아 있었다. 이 반통도 내일이면 냉장고에서 방을 빼게 될터다. 수박 마니아 둘째 녀석이 저걸 놔둘 일이 없으므로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일수록 나와 신랑은 맛없다는 듯 덜 먹게 된다. 이미 그것은 우리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정해논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이 잘 먹는 음식은 왜 늘 우리가 먹어선 안될 음식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올여름엔 수박이 좀 쌌으면 좋겠다. 작년엔 한통에 삼만 원이 넘어가는지라 거의 사 먹지 못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치킨에 피자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까. 올해엔 그래 까짓것 수박 반통에 만원! 그 정도는 사준다! 하는 말을 자주 했으면, 그리고 우리 부부의 몫으로 남은 수박도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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