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세월의 부산물과도 같은 약간의 비열함을 안고 살아간다. 상대의 비련과 고통과 아픔을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저 그런 건조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이내 자신의 삶을 돌아간다. 그저 그런 공감을 습관처럼 던지지만 그건 세월이 만든 가면이 내놓은 말일뿐 나의 말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안다. 상대가 가진 고통의 무게를 일부도 짊어갈 수 없는 우리는 참으로 비열한 존재라는 것을. 그걸 알기에 상대를 안아주기도 감정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그냥 앵무새 같은 눈으로 관찰한다. 나와 상대를. 관찰력은 늘어만 간다. 앵무새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도 비슷한 말들을 내뱉는다. 햇살이 비친 유리창 같은 앵무새의 동공 속 예리한 각들은 나를 벤다. 자신도 앵무새면서. 매일 지하철 출근 비비적대는 수많은 사람들, 또 좁은 아스팔트 건물 속에서 하하호호 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동물원 속 조랑말이 된 서늘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서늘함이 무섭게 느껴질수록 우리는 더욱 휴대폰 작은 액정 속으로 침잠한다. 스트리밍 되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잠깐의 서늘함을 덥혀준다. 공감과 낭만이 사라진 사회에 이 두 자본주의의 상징은 그것들을 짜내어 요리한다. 그것도 잠시 괜히 노란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쓸어 넘기나 역시나 씁쓸하기만 하다. 비틀거리며 걷다 운수 좋은 날 테이블 위 초록빛 소주병 너머 이성을 바라본다. 몇 번의 경쾌한 소음 뒤 붉은 얼굴로 하룻밤 지나면 멋쩍어질 감정들을 토해보지만 눅진한 관계는 금방 끝나버린다. 높게 뜬 환한 햇살은 우리의 비열함을 들출 뿐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나만 그렇게 사는 것 같아 외로움은 덧칠된다. 역설과 가식의 연속. 낭만은 있을까. 그런 의문도 사치. 우리는 다시 그 비열한 아침 날 시루떡 같은 지하철로 몸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