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소설: 쓰고보니 나만을 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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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Growthcus



그레이엄 그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따금 나는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고유한 광기와 멜랑콜리, 돌연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 <한낮의 우울> 중




소설가의 공통점은 소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소설을 많이 읽다 못해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좋아하면 소비하는 것으로 성이 안찬다. 결국 생산자가 된다. 영화라는 장르에 매료된 소년 소녀는 영화배우나 감독이 되고자 한다.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설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단편소설 하나 써본 적 없다. 그런데도 소설을 썼다. 뭐라도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게 글쓰기말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는 웹소설 시장의 태동기였다. 웹툰 작가처럼, 웹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보였다. 그걸 해보기로 했다. 소설을 두 편 썼다. 좋은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 좋은 소설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평생 먹어 치운 타인의 소설은 자양분이 된다. 직접 소설을 쓸 때 꽃을 피워낼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나는 소설 자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음악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을 통해 어느정도 연주할 수는 있다. 다만 그것으로 먹고 살 수는 없다. 딱 그 정도 느낌이었다.


내가 읽어도 재미가 없었다. 인물은 종잇장처럼 얄팍했고, 묘사는 빈약했다. 대화는 목각 인형이 뱉는 말 같았다. 전체적으로 생기가 없었다. 시놉시스를 쓸 수 있는 능력만 있었다.


시놉시스는 시놉시스일 뿐, 소설이 아니다.


쓰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모든 소설은 작가의 내면 세계가 투영된다는 것이다. 처음 쓴 소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가 냉동 실험에 참가해 2050년경 미래에서 깨어난다. 스마트폰, 로봇, 드론, 아바타 등이 결합된 '펫'이라 불리는 비서가 정령처럼 어깨 위로 날아다니며 주인공의 적응을 돕는다.


이래저래 해서 여주인공을 만난다. 당연히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안드로이드, 그러니까 로봇이다. 미래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에서 깨어난 주인공 입장에선 너무 혼란스럽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됨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며 알아보자]


제목은 <안드로이브>였다. 끝까지 쓰지 못했다. 쓰다가 중간쯤 읽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장르를 따지자면 웹소설이 아닌 알랭 드 보통 류의 철학 소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등을 읽어보면 같은 말을 한다. 일단 쓰레기인 초고를 뱉어낸 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고 고치는 게 소설가의 작업이라고.


2고는커녕 초고도 끝까지 쓰기 힘들었다. 재미는 둘째치고, 이야기를 끌고 나갈 정신적 힘이 부족했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도 소설가는 피지컬적으로 강인해야 하기 때문이랬다. 내겐 그런 힘이 없었다.


소설의 주제 의식인 인간됨을 논하기엔 내면이 너무 황폐한 상태였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 소설 속 세계를 구축하는 법인데, 내면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당시 나는 남주와 여주가 만나는 부분까지만 쓸 수 있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할지 그려지지 않았다. 그만 쓰기로 했다.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당시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눈을 뜨면 다른 세상에서 살아있고 싶었다. 잠을 많이 자는 것도 현실이 형벌 같았으니까 한 거고, 게임것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한 제정신을 잃고 싶었다.


뭐라도 해야겠어서 시작한 소설 쓰기였다. 쓰다 보니 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래에서 깨어나는 소설 속 남주인공에 내가 묻어 있었다. 우울증 따위, 미래 기술로 고치면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가?


내 소설은 그렇게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 속 투영된 내 마음을 발견하는 것만이 수확이었다. 나를 위한 소설이었다.




첫 번째 소설은 겨울 내내 썼다. 햇볕을 쬐기 시작하며 얻은 힘으로 새롭게, 한번 더 써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웹소설에서 잘 팔릴 수 있을만한 것을 생각한 후 썼다. 한국형 히어로물 컨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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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본질적 능력이 부족한 것을 빼면, 쓰는 동안 즐거웠다. 본질적 능력이란 처음에 언급한 캐릭터의 입체성, 사건의 핍진성, 대사의 생기 같은 것이다. 그동안 내가 재밌게 읽은 책이 <총,균,쇠>, <사피엔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같은 종류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첫 번째 소설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작가의 세계가 투영됐다. 소설이 원체 그런 장르라고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경험하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바다에 대해 듣기만 한 사람이 발목을 담글 때의 감각이었다.




내가 투영한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비 온 뒤 떨어진 꽃이 썩어가는 모습, 본 적 있는가? 추하고 더럽다. 본디 아름다울 것이 썩고 있어 그렇다. 대비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 썩은 꽃은 20대를 들이부은 교회였다. 한국사회에서 교회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교회가 힘을 갖기 전, 본질을 유지할 때는 순기능을 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닮는 것엔 관심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팔아 장사하며 본질을 놓쳤다.


헌금은 돈 놓고 돈 먹기가 된다. 교회는 돈을 모아 이웃을 돕지 않고 건물을 짓는다. 계층과 인종을 비롯한 모든 장벽이 허물어졌던 교회가 그저 사교 활동의 장이 된다. 사회에서 잘나가면 예수 안 믿어도 장로님이 된다.


신학교는 등록금 장사하느라 바쁘다. 말도 안되게 짧은 기간 동안 돈 내고 교육받는 시늉 하면 목사 라이센스가 발급되는 곳도 있다. 목사라는 명사는 종교 면보다 사회 면에 더 자주 출몰한다. 저질 목사가 양산되니 QC(퀄리티 컨트롤)가 안된다. 천주교 신부님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20대 초반에는 교회가 아름다운 꽃이라 느꼈다. 가치있다 여겼기에 나를 들이붓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썩은 실체를 알게 되며 악취와 고름에 구토감을 느꼈다.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다룬 작품을 보면 그때는 불교가 썩은 꽃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멀어지고, 사람을 착취하는 지배 세력의 통치 이념이 되어버린 종교.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그 역할은 기독교가 담당하고 있었다. 예수와 관계없는 가짜들. 이런 나의 인식과 내면 세계가 투영됐다.


소설 장르를 히어로물로 잡았기에 자연스레 빌런이 나타나야 했다. 작가인 나는 빌런의 직업을 목사로 설정하고 있었다.


소설 마지막, 주인공은 빌런 목사와 그의 신도들이 예배하는 건물을 부순다. 그들을 몰살시킨다. 성경 유명 인물 중 삼손의 이야기를 오마주했다.


교회를 떠났지만, 그곳은 내 고향이었고, 지금은 썩었지만 원래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썩게 만든 사람들이 미웠다. 예수를 가져다 장사하는 사람들로 인해 예수가 조롱 받는 모습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테러를 가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소하지 못한 울분이 내면에 가득함을 소설을 쓰며 발견했다. 신문 기사를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와 목사들이 사회에 덕이 되지는 못할망정 해악을 끼치는 뉴스가 나왔다. 그런 정보를 접할 때마다 온 신경이 곤두서면서 미칠 것 같았다.


소설에서 그들이 죽는 순간, 정확히 말하면 내가 죽는 결말을 써낸 다음날 일어난 일이다. 내 면에서 '문학적으로나마' 그들이 죽었다. 소설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내 의식세계에서는 ‘죽은 것으로 처리’하게 됐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은 나와 아무 관계 없다. 그들은 내게 있어 죽은 사람들이다.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 안에서 죽은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그런 소식이 들려도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죽었으니까 의미 없고 화낼 이유도 없다. 문학적 해소, 예술정 승화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두번째 작품도 나를 위한 소설이었다. 다시 처음에 놓았던 글귀를 가져온다. 그레이엄 그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따금 나는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고유한 광기와 멜랑콜리, 돌연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 <한낮의 우울> 중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실로 광기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때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광기다. 미친 짓이다. 내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일도 그렇다. 그런 교회 - 라고 쓰고 종교 사기꾼 집단 - 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미워도, 죽일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기였다.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가 밉다는 것? 그 자체로 미친 기운이다. 글을 통해 광기를 쏟아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유튜브 댓글, 포털 뉴스도 이런 종류의 광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는 스트레스 공장이다. 살다 보면 미운 사람이 생기고, 화가 나는 일이 발생한다. 어딘가 발산해야 하는데 발산할 곳이 보이지 않는다. 동네 북 발견됐다 싶으면 다같이 가서 욕을 퍼붓는다.


그레이엄 그린의 말처럼, 우리 모두 함께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잔혹한 복수극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정신을 마비시킬 만큼 독한 노래를 만들고, 보고 있노라면 정신병 걸릴 것 같은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지 않을까.


링컨이 편지를 받고 화가 나면 답장을 써서 서랍에 넣어놓고, 다음날 그것을 태웠다는 얘기처럼 댓글란 말고 다른 곳에 쏟아낸 후 태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상념은 여기에서 멈춘고 다시 돌아간다.


소설을 다 썼다. 나만 보기로 했다. 나만을 위한 작품이었다. 그것이 나를 광기로부터 구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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