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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Oct 17. 2021

핑계가 무덤이 될 때

서옥설

허허, 괴이한지고...”


곳간 신은 집안의 살림이며, 온갖 재물을 관리하는 신이다. 그런 그가 한참 동안 장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는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라.


“여봐라, 게 병사들 있느냐?”

“예, 명 받잡겠나이다.”


   곳간 신은 자신이 부리는 병사들을 불렀다. 곳간의 물건들이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줄어있으니 어찌 된 일인지 사태를 소상하게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엄히 명령을 내렸다.


“흐이이익!”

“아이 씨, 이거 봐. 내가 걸릴 거라고 했지?”


   병사들이 곳간에 가보니, 과연 곳간 신의 말대로 큰일이 벌어졌음에 틀림없음이라. 밖에는 송아지 한 마리도 들락날락할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고, 안에서는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창이며 칼을 굳게 움켜쥐고 벼락같이 함성을 지르며 들어가니 거기에는 웬 커다란 늙은 쥐 한 마리와 수백 마리의 쥐들이 대들보 위에 자빠지고 쓰러져 낄낄대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 몰라하더라!


   웬 하얀 것이 바닥에 잔뜩 뿌려져 있어 ‘벌써 첫눈이 내렸는가?’ 하였는데, 이놈들이 먹어치우는 것을 넘어 가지고 놀다 어지럽게 흩어진 쌀알들이 아닌가,


   병사들은 노기가 충천한 곳간 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몹쓸 쥐새끼들아, 오라를 받아라!” 하고 늙은 쥐는 물론, 생쥐 한 마리까지 모조리 포박하여 얼른 갖다 바치었다.   


“잔말 말고, 바른대로 고 하거라!”


   곳간 신은 병사들이 잡아 꿇린 늙은 쥐와 무리들을 보자마자 노발대발했다. 본래 살던 곳을 이탈하여 곳간에 구멍을 뚫고 곡식을 먹어치운 큰 잘못을 지적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곳간 신은 늙은 쥐에게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 죄가 크다며, 누가 너와 무리들을 꼬드겼는지 바른대로 말하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지 마자 늙은 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병사들이 들이닥칠 때만 해도,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하며 가슴이 황천까지 내려앉는 듯하였으나, ‘누가 꼬드겼냐’고 묻는 곳간 신의 말에 이제는 하늘의 선녀들과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제 주름 잡힌 얼굴과 이 비루한 몸뚱이를 보십시오. 저는 다 늙어 보잘것없지만, 본래 욕심 없이 깨끗한 몸이옵니다. 다만 배가 너무나 고파 식솔들과 그저 잠시 쭉정이로 허기를 잠시 면했을 뿐입니다요...”


   늙은 쥐의 예상대로 곳간 신은 쥐들의 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마를 한껏 구기더니,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겠냐’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음번 소리를 지를 때에는 지옥불이라도 그 입에서 나올 기세였다. 그제야 쥐는 안심하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가 저를 유혹했습니다.”

“여봐라, 당장 가서 그놈들을 잡아 오너라!”


“아유, 저희는 그저 바람이 불기에 흔들렸을 뿐입니다. 저 늙은 쥐의 거짓말에 속지 마소서.”


   곳간 신은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그냥 풀어줄 수는 없어 옥에 가두었다. 나름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석연찮았기 때문이다. 다시 늙은 쥐에게 곳간 신이 추궁을 하자 이번에는 ‘곳간을 지키는 문의 신과 대들보를 지키는 신인 호령이 자기를 꾀었다고 변명했다.


   문의 신도, 호령도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문의 신은 대들보 위만 보다 그만 대들보 밑으로 땅을 파고들어 온 쥐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고, 호령 역시 쥐들 따위가 이렇게 대범한 짓을 할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며 용서해달라고 싹싹 비는 것이 아니겠는가?


   곳간 신은 한편으로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해달라는 두 신의 태도가 불편하지 않았으나, 이 역시 그냥 보내기에는 석연치 않아 옥에 가두라 하고는 다시 늙은 쥐와 그 일당들에게 누가 배후에 있는지를 대라고 으름장 놓기를 반복하더라.


   그러는 동안 누런 개요, 고양이며, 성성이와 두더지, 고슴도치며, 수달에, 노루와 토끼, 돼지와, 염소, 원숭이와 코끼리는 물론 이리와 곰, 노새와 말에, 소와 말 같은 동물들이 잡혀와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범이며, 용, 사자와 기린(동물원에서 보는 그 기린이 아니다), 까지 온갖 신묘한 재주를 부리는 신수들까지 자기들을 꼬셨다며 변명을 대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 보니 곳간의 신이 일하는 곳에는 온갖 짐승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 모습을 오랏줄에 묶여 보던 늙은 쥐는 어느새 잡혀온 모든 동물들을 보며 같잖다는 듯 몰래 비웃었고, 그 모습을 본 동물들이 앞다투어 늙은 쥐의 평소 행동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쥐의 잘못을 고발하기 시작하자, 늙은 쥐의 얼굴에는 여유가 달아났다.


“저... 저.. 저놈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번에야 말로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늙은 쥐와 그 일당은 앞 다투어 ‘이제는 정말 말하겠다’며 간절히 빌었지만, 노한 곳간 신은 ‘저 놈이 주둥이를 더 나불대지 못하도록 큰 돌로 이빨을 부수라’고 명했다. 그러자 늙은 쥐는 넙죽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번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 들의 도깨비와 산의 귀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떠도는 바람과 구름과 안개와, 별과 해와 달이 모두 상제의 명을 받고 제게 곡식을 훔쳐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희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제 곳간 신은 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분노에 차 떨리는 손으로 상제께 문서를 올리었다. 그 필체만 보아도 가히 그 마음을 쉽게 짐작 하리오 마는, 그 내용을 보니 곳간 신이 얼마나 골치를 썩었는지 알 수 있더라.


‘신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곳간을 도둑맞았나이다. 또한 도둑 떼를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하였으니,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오나, 이 일로 인하여 목숨 줄이 날아가는 이들이 많아질 것을 염려하옵고, 이 벌레 같은 도적놈들이 감히 존귀하신 상제를 욕보였기에 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이르렀나이다. 오직 공명정대하신 상제의 명을 받잡을 따름이옵니다.’


   상제께서 이 문서를 보시더니, 단번에 핵심을 아시더라. 판결하시기를.


“한낱 미물로 인해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나, 그 죄가 심히 무거우니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구나. 즉시 형을 집행하여 누명을 쓴 모든 짐승들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곳간 신은 이 문서를 받는 대로 도적 떼의 목을 베라. 길 위에 시체를 버려두어 짐승들이 그것을 벗기고, 물어뜯으며, 도려내고, 나누게 하여 원통함을 조금이나마 씻게 하라. 또한, 옥에 가둔 짐승들은 풀어주고, 남은 도적들은 그 잔당까지 없애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게 하여라!‘


   하시었다. 이에 곳간 신은 상제의 명을 받잡아 곳간 문 앞에서 늙은 쥐의 목을 사정없이 베고, 옥문을 열어 짐승들을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그네들에게 외치기를,


“자, 상제께서 너희에게 마음껏 보복해도 좋다는 명을 내리셨다!”


   하고 외치니 모든 짐승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온갖 난장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짐승 중에 가장 어질고 훌륭한 기린과 봉황이 말리며 말하기를,


“너희들의 보복이 이미 도를 넘어섰다. 어찌하여 이미 죽은 자를 이리 욕보이는 것이냐?”


   하였다. 그 말에 무리는 민망하여 모두 흩어지더라. 곳간 신은 군사를 다시 불러 쥐의 소굴을 뒤지라 명하였으나, 이미 고양이에게 하나 없이 죽임을 당한 후더라. 마침내 땅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고 쥐구멍을 없애니, 그 뒤로 양식이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일은 사라졌다고 한다.


- 임제, ‘서옥설’ -


“다음부턴 똑같은 실수 반복하지 마, 그럼 돼. 수고해.”

“넵, 감사합니다!”


   왜 그랬을까... 실수를 했다. 수백 번은 아니었어도 몇십 번은 다시 본 것 같은데, 업무용 문서에 오탈자를 냈다. 회의 때 모두가 볼 문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걸 찾아낸 건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 우리 부서 S부장이었다.


“*페이지, 000인데 @@@으로 오타가 났습니다. 이점 참고하셔서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 회의 시간, 매섭기로 사내에 유명한 그의 목소리는 그날따라 더 차가웠다. 가슴이 내려앉는 걸 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 진짜 x 됐다!’ 생각했다. 회의에 집중이 되지 않는 건 당연하고, 끝나고 따로 부르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곳간 신 앞에 끌려와 오랏줄에 묶인 채로 심문받았던 늙은 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곳간 신만큼 무서운 상사의 고함 소리가 회의 후 내 고막을 찢을 것처럼 울릴 상상을 하니 나도 늙은 쥐처럼 위기를 모면하려 온갖 변명 거리를 꺼내기 위해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렸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그 문서 제가 담당했습니다. 끝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회의 후 부장님께 달려가 뱉은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변명하기 싫었다. 어쨌든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실수한 사람은 나였다. 그러니 욕을 먹거나 조인트를 까여도 별 수 없었다. 죄송한 건, 죄송한 거니까.


“**씨, 고개 들어.”


   계속 허리를 굽힌 채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면 호랑이 같이 변한 S부장의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테니까. 그러고 나서 욕을 하던지, 구둣발로 조인트를 까던지 할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욕을 하거나, 조인트를 까는 대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너무 기죽지 말라고, 대신 똑같은 실수는 다신 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했다.


   저 멀리 사라지는 S부장을 바라보며 그제야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도대체 왜 나를 혼내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나중에 동료에게 들어보니 ‘죄송합니다’ 말하며 실수를 인정하는 모습이 그의 맘이 들었다고 한다.


   만약 S부장에게 이 핑계, 저 핑계 댔다면 어땠을까? 예상대로 욕먹는 건 기본이고, 조인트도 덤으로 까였을 건 분명하다. 실수이건, 그렇지 않건 사람은 실수하고, 잘못하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모두가 하는 실수지만, 그것이 내 것일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그런 실수,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보다 쉬운 일을 택하곤 한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핑계’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도 핑곗거리는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실수에도 이유가 있고, 잘못에도 사유는 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며 책임전가만 하다 보면 언젠가 핑계가 당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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