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질투, 그 오묘함
여우는 한참 동안 나무의 열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얼굴을 한껏 구겼다. 저기 천장에 매달린 굴비를 오래 들여다본 자린고비가 ‘짜다’ 생각했던 것처럼, 어쩌면 여우도 과실의 맛을 너무 진하게 느껴버린 탓일까?
“셔!” 소리를 지른다. “시다고!! 분명 저건 신 포도일 거야!” 이 짐승의 말처럼 나무에 매달린 그 열매가 신 맛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신 포도’가 포도밭 너머에도 매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연히 어떤 명품 브랜드의 매장에 들어갔다. 맘에 드는 옷을 발견했다. 가격표를 확인한다. ‘아, 잠깐.’ 지갑과 잔고를 생각한다. ‘오늘이 며칠이지?’ 빠르게 계산을 해본다. 그때 마침 사이즈가 눈에 들어온다. ‘안 되겠다. 나에겐 너무 큰 옷이다.’ 어쩔 수 없이 매장 문을 나온다.
다시 생각해보니 똑같은 디자인의 다른 브랜드 제품을 어디서 본 것 같다. 초록 창에 들어가서 이미지 검색이었나? 그걸 이용해서 찾아보기로 한다. ‘굳이 저런 명품을 살게 뭐람? 가성비가 짱이지.’ 그래, 사람에게 포도밭은 없다. 그래도 신 포도는 널렸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르상티망’을 가지고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강자에게 품는 시기심에 대해 말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포도밭 여우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가성비’나 ‘정신승리’의 태도를 취하는 대신 그것에 예속, 복종한다.
만약 주위의 모든 사람이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데, 자신만 없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물론, 당신은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좋아하는 타입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아, 나만 고영 없어!’ 푸념하며 고양이를 입양함으로써 불안을 해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명품 가방, 옷뿐만 아니라 고급 자동차, 명품 시계를 보며 ‘아, 나만 고영 없어!’를 외친다.
니체는 ‘노동자는 자본가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한 공산당 선언을 이러한 현상의 전형적 예라고 말했다. 왜 우리는 우리 안의 열등감이나 질투를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기 보다 열등감이 향하는 대상을 부정할까? 어쩌면 우리는 노력과 도전을 하는 것보다 그저 순응하거나 아예 도피해버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특정 브랜드의 판매를 촉진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좋은 원동력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환경에 지배 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환경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래, 인간은 질투한다. 이제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여우가 떠난 자리에서 땀을 흘리며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다. 아, 어쩌면 이리 가혹한 운명을 인간은 타고났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식 없이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질투한다면, 질투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