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 김지혜 지음
우물에 대하여
이윽고 그대의 손가락이 여자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발가락 발등 발목을 거슬러 올라 이제 종아리에 멈춰진 그대의 손, 떼어내버리고 싶다 조금만 더 올라온다면 죽여벼릴 테야 그러나 여자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다 그대 손아귀가 더 거세므로 거센 손아귀에 붙잡힌 여자의 아랫도리는 이내 복종을 알아차린다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여자의 아랫도리는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바닥 없는 곳으로 한정 없이 가라앉는다 음지 깊숙한 곳에 물이 흘러와 고인다 물은 여자가 흐느낀 시간, 시간이 흘러와 고인다 고여 깊어진다 시간은 콜타르를 칠한 벽처럼 말없이 고요하다 그 벽에서 기적처럼 만삭의 달이 둥실 떠오른다 수면 아래서 달이 빙그레 웃는다 달이 숨 쉴 때마다 여자가 사과처럼 웃으며 흔들린다 그러나 그대, 기어코 탐욕스러운 손아귀를 밀어 넣는다 달을 거칠게 움켜쥔다 여자의 심층이 뿌리부터 요동친다 조금만 더 들어온다면 죽여버릴 테야 그러나 그대, 달을 움켜쥔 그대가 이젠 시간이다 그대의 억센 힘이 달을 일그러뜨린다 여자가 파닥파닥 몸을 뒤튼다 우물이 덜컹거린다 시간의 물이 주워 담을 수 없는 속도로 흘러넘치기 시작한다 그대 손아귀에 쥐어졌던 달이 온데간데없다 달이 사라지자마자 그대의 손이 뼈를 드러내며 타들어간다 여자가 고사목 음색으로 낄낄거린다 다 죽여버릴 테야 여자의 아랫도리가 삽시간에 뻣뻣해진다 우물이 강퍅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달도 손아귀도 요동도 없는 바닥, 가만히 웅크린 짐승 한 마리, 그 시커먼 세계가 다리를 벌리자 이윽고 물이, 물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