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빛났던 그때

화양연화(花樣年華)

by 정춘필

국민학교 때, 비 오던 봄날.

시장 골목, 엄마 점빵의 따뜻한 구들 위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던 그때.


찌는 듯 더웠던 여름날.

소나기가 지나고 다시 뜨거워지는 신작로 위로

짐발이 자전거를 배우러 나가던,

하늘 위에 쌓인 적란운 사이로 잠자리가 날던 그때.


가을날, 영산강 둑길.

수업이 일찍 끝난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걸었던 그 길,

하늘하늘 코스모스가 바람에 나풀거리던,

하늘 높고 바람 시원했던 그때.


어느 겨울밤, 눈이 발목까지 오던 날.

따뜻한 아랫목에 온 식구가 모여 티브이를 보다가

아버지가 “아이스크림 사다 먹을까?” 하셨을 때.

폭폭 빠지는 눈을 밟으며 아이스크림 사러 나가던 그때.


수업이 끝난 늦은 오후,

어둑해진 성당 잔등길,

골목을 돌아 집으로 오는 길,

들창마다 켜지던 하얀 불빛이

걸음을 따라 하나씩 반겨주던 저녁.

골목 가득 퍼지던 김칫국, 된장국 냄새.

유달산 너머로 떨어지는 해 그림자 따라

냄새도 구불구불 골목길을 채워가던, 그리운 그때.


처음 데모하러 올라간 그해 여름, 서울.

뜨거운 아스팔트를 피해 보도 연석에 앉아 있던 오후.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떨어진 햇빛이,

하늘거리는 하얀 스커트 주름에 부딪혔다가

더 하얀 얼굴로 튕겨 오르던.

그 햇빛조차 눈부셔 손그늘 속에서 눈을 찡그리던,

고왔던 그 아이의 얼굴이 정지화면처럼 눈앞에 남아 있던, 내게 가장 빛났던 그때.



※ 짐발이 자전거 : 뒤에 철제 짐칸이 달려 있어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만든 자전거. 예전에는 시장이나 골목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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