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취업 도전기 1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발아래로 느껴지는 경사가 급하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두 차례 긴 계단을 오르는데 몇 번의 숨을 고른다. 이렇게 비좁고 굽이진 골목을 걷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오늘까지 읽어야 할 책 한 권과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이 무거워서 인지,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우산까지 쓰고 있어서 인지, 그냥 체력이 문제인 건지 — 전부 다인지. 아무튼 보기보다 힘겹게 그곳에 도착했다.
집에서 차를 타고 20여분 걸려 이 도서관에 왔다. 보기 드물게 무료주차장이다. 운이 좋게 한자리가 비어있어 얼른 주차를 했다.
어제는 출력을 하려고 동네 문구점에 갔었다. 이메일을 열었는데 내용 없는 빈 껍데기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 덜렁 들어있다. 열심히 작성한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자책하지 말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걸어 행정복지센터로 갔다. 무인발급기에서 필요한 서류를 출력했다. 내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해서 그것들과 함께 도서관에 제출하면 된다.
도서관에 차를 두고 올라갔던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습한 데다 한참을 걸어와서 꽤 더웠다. 오랜만에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시켰는데,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1+1 쿠폰을 내밀어 두 잔을 받았다. 마시다 보니 너무 추워져서 다 마시지 못했다. 얼음이 녹아 묽어진 커피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돈을 버린 건 아니니까 괜찮다.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였다.
내일 독서모임 책인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을 다 읽지 못해 꺼내 들었다. 그녀의 글은 밀도가 있고,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책을 읽다 보니 나도 글이 쓰고 싶어진다. 브런치스토리를 열어 예약글을 읽어본다. 읽을 때마다 계속 수정하는데, 이게 나아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수시로 조사를 바꾸고, 티도 안 나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친다. 그리고 새로운 글도 조금 끄적인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 전에 다 봤을, 나 혼자 뒤늦게 시청 중이 ‘응답하라 1988’이 보고 싶어진다. 넷플릭스를 열었다.
고3이 된 덕선의 엄마가 담임선생님과 입시상담을 받는 날이다. 좋은 대학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4년제만 들어가면 됩니다. 그냥 아무 데나 개안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덕선 엄마에게 담임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한다, 지금 성적으로는 4년제도 위험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은 아예 힘들다고 봐야 합니다. 실망한 덕선과 덕선엄마의 표정 위에, 이미 늦은 위로가 따라붙는다, 그래도 아직 1년 남았으니까요,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 수연이 뒤에 400명이나 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온 덕선 엄마는 덕선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덕선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엄마를 향해 울면서 외친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엄마, 미안해.
나도 같이 운다. 그녀는 어쩐지 과거의 내 모습 같다. 하지만 덕선이는 착하고, 양심이 있다. 나는 왜, 엄마에게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엄마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하고 계셨는데, 나는 왜 내 자리를 자꾸 이탈하고 있었을까. 지난달에 냈던 이력서가 떠오르고, 곧 낼 이력서가 겹쳐 보인다.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한 지난날들, 특히 학창 시절.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지금 내 모습은 조금 달랐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에어컨 바람이 등을 타고 내려오자, 점점 더 추워온다.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근처 프린트카페에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출력했다. 내려온 길과 달리, 골목길을 이용해 다시 도서관으로 오른다.
면접을 보고 떨어진 기억은 거의 없다. 지인들은 내 인상이 좋아서라고들 말한다.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대체로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이제는 면접 볼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누가 학원장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겠는가. 누가 사서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자료정리원으로 쓰고 싶겠는가. 시간은 많고, 남은 날도 많은데 — 사회인으로서 내가 설 자리는 없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노안으로 삶의 질이 떨어진 듯하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된 듯한 기분까지 드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씩씩한 사람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망도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력서를 들고 다시, 힘차게 언덕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수연이는, 대학을 잘 가기 위해 이름까지 바꾼 덕선이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그녀가 합격한다면 나도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응답하라 1988'은 아직 5회나 남았으니, 내 결과가 먼저 나올 것이다. 나도 붙고 덕선이도 대학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