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집에게 건네는 이기적인 인사
이 주일 안에 집 정리를 마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삼 일이 더 걸렸다. 이사 온 뒤 일주일 넘게 딸아이는 집에 머물렀고, 두 번의 약속으로 외출을 했다. 한 번 가면 반나절이 걸리는 병원은 네 번이나 다녀왔다. 남편도 하루를 제외하곤 거의 매일 집에 있었다. 그러니 정리가 늦어진 데에는,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집은 결혼 후 여덟 번째로 살게 된 집이다. 첫 집, 신혼집은 나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경기도 구리, 시댁 바로 옆 아파트였다. 강남에 오래 살았고, 회사도 강남에 있었던 나는 구리에 들어가 사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드러내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골라둔 두 개의 집을 보고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 집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맞벌이를 하며 야근이 잦은 회사에 다녔고, 집에 머무는 시간도 짧았다. 집들이는 열 번쯤 했던 것 같지만, 그뿐이다. 처음 살아본, 분위기 없는 동네의 깨끗한 아파트. 시댁 가까이 있던 집, 신혼집, 첫 집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다.
두 번째 집은 내가 어릴 적 자란 동네에 있었다. 추억 가득한, 정겨운 그곳에서 새 가족과 다시 살고 싶었다. 동네는 좋았지만, 집은 너무 좁았다. 2년 후, 길 건너 옆 단지의 조금 더 넓은 세 번째 집으로 이사했지만 그 집도 여전히 작았다. 5층짜리 아파트의 4층. 네 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고 오르내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집에서 더 살고 싶었다. 하지만 계약이 끝나기 두 달쯤 전, 집주인은 우리에게 나가달라고 말했다. 쫓겨나는 기분에 발끈한 남편은 말했다, 그냥 집을 사버려야겠어. 나는 분당에서 자리를 잡자고 했다.
결혼 당시, 시댁에서 구해준 집은 전세 삼천팔백만 원짜리였다. 그 뒤 4년 동안 살았던 개포동 집은 어느새 1억 가까이 되었고, 우리가 사고자 했던 분당의 집은 2억이 넘었다. 남편은 모기지론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다가 결국 그 집을 샀다. 분당 집은 우리의 첫 자가였기에, 우리는 애정을 듬뿍 담아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들어갔다. 딸에게 최고의 방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바닥 단을 높여 매트리스를 깔고, 벽면을 덧대어 경사진 벽면을 만들어 주었다. 덧창문을 달고, 은은한 불빛이 퍼지는 예쁜 샹들리에까지 달아주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꿈꾸던 빨간 머리 앤이 머무를 듯한 방이었다. 인테리어 전공자인 우리 부부는 스타일리스트인 동생과 머리를 맞대어, 22평의 작은 아파트를 거실, 주방, 세 개의 방 모두 각기 다른 개성으로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랫집 아주머니는 이틀에 한 번씩 올라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도들과 예배를 보고 찬송가를 불러대던 그녀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낮잠을 잘 수가 없다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횡포를 부렸고, 여섯 살 딸아이는 까치발로 조심스레 집안을 걸어 다녔다. 당시 나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우리는 이사를 결심하고 분당동에서 광주의 신현리 단독주택까지 알아보다가, 친구 집들이로 가보게 된 동백의 한 아파트 1층으로 이사를 했다.
거실에서 문을 열면 우리만의 작은 마당이 주어진 집이었다. 그동안 살았던 집들보다 넓고, 지은 지 얼마 안 된 곳이라 깨끗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 딸아이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놀아도, 돌 지난 둘째가 맘껏 뛰어다녀도 되는 곳이라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곳에서 재취업을 해서 6년 정도를 일했고, 10년 가까이 살았다.
큰딸이 고3이 되고, 둘째가 입시를 준비하면서 다시 분당으로 왔다. 여섯 번째 집이었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분위기 좋은 카페 거리가 인근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그 집에서 큰딸은 대학에 갔고, 둘째 딸은 예중에 입학했다.
6년 후, 서울에 위치한 대학교를 다니는 큰딸을 생각해 지하철 2호선이 가까이 있는 집, 둘째 딸이 다니는 학교의 셔틀버스를 고려해 잠실로 이사를 했다. 20년 만에 살게 된 서울이었지만, 2년 후 다시 분당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지난달의 일이다.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서 왔지만, 이유가 어떻든 다시 돌아온 분당은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곳이었다.
전세와 자가를 반복하며 살아왔고, 지금 집은 전세이다. 늘 '내 집'이라고 생각하며 살았기에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벽에 못을 박지 말라거나 애완동물 금지라는 계약서의 내용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너무해, 전세살이의 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지난 잠실에서의 2년은 좋은 기억이 없다. 있었지만 잊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낸 곳이라 떠나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편은 우리가 이사 들어가기 전에 살았던 남자에게서 부정이 탄 것 같다고 했다. 힘든 일을 겪으면 작은 억지 이유라도 찾고 싶어지는 마음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 뿐, 다시는 나쁜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담아 말이다.
집을 저녁에만 보여준다고 해서 7시쯤 딸들과 함께 집을 보러 갔다. 남편은 해외 거주 중이라 함께 가지 못했다. 그날은 단지에서 여섯 번째로 본 집이었다. 주차는 입주민이 등록을 해주어야 가능한데, 그 집에 사는 남자는 주차 등록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상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넓은 단지를 걸어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그 호수의 벨을 눌렀는데 먹통이었다.
경비실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으로 올라갔다. 현관 앞에서 다시 벨을 눌렀지만,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함께 간 부동산 중개인이 문을 두드리고 한참을 기다려서야 문이 열렸다. 집 안은 등이 대부분 고장이 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딘가에 한두 군데 희미하게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너무 흐려서 집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건물 불빛만이 집안을 간신히 밝혀주고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서 있는 오른쪽 방은 창고로 쓰이는 듯 짐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접혀 있는 휠체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문을 열어준 남자는 구부정한 등에, 하얗게 센 숱 적은 머리가 흩날리는 것이 마치 영화『백 투 더 퓨처』의 브라운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어, 묻는 말에도 쭈뼛쭈뼛할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70대 노인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계약하는 날 알고 보니 놀랍게도 50대 후반이었다. 거실과 주방, 안방, 안방 화장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했고, 주방 앞 작은 방에만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일한 에어컨이 그 방에 있었고, 암막 커튼으로 벽면 가득한 창을 모두 가려 놓았으며, 방문에는 방음 줄도 부착해 있었다. 부동산 중개인과 나는 밖으로 나와서야 당황스러움을 쏟아냈다.
저분은 뭘까, 어딘가 많이 아프거나 운둔 중인 작가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의 장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음침하고 칙칙한 집을 화사하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사 들어오던 날 집주인은 그 남자에게, 남의 집이라고 어떻게 집을 이렇게 쓸 수가 있느냐, 고 화를 내며 따지듯 물었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분은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새로 도배를 하고 등을 달았으며, 붙박이장도 설치했다. 47평에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33평으로 이사를 했는데, 의외로 아늑한 느낌이 좋았다. 자주 얼굴을 마주치니 가족 사이도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식탁에서 테헤란로가 길게 보이면 남편은 시티뷰가 멋지다며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어디를 가든 교통이 편리했고, 주변에는 온갖 맛집이 주변에 즐비한 핫한 곳이었다. 주말이면 야구장에서 나는 함성이 활기찼고, 수시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아침에는 남쪽 거실 창으로, 저녁에는 서쪽 주방 창으로 빛이 들어와 하루 종일 밝았다. 하긴 밤에도 눈부시게 밝은 곳이었다. 한강이 가까워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기도 했고, 걸어서 산책도 다녀왔다. 계절이 바뀌고 창을 열기 시작하면서 밖에서 들리는 소음이 생활의 큰 불편으로 다가왔다. 매연과 함께 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기가 좋지 않았다. 이사 오자마자 대형 공기청정기를 렌트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이곳에서의 삶에 막을 내려야 했던 일이 일어났고, 여러모로 씁쓸한 기억을 안고 그곳을 떠났다.
집 뒤쪽에는 작은 산이 있다. 새소리로 아침을 시작하고, 비가 오거나 흐린 날 저녁이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단지 내에 줄지어 있는 벚꽃나무에는 이사하고 며칠 만에 우리를 반기듯 벚꽃이 만개했다. 결혼한 지 28년이 되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순탄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2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무난했었다. 이제는 ‘무탈’, ‘무사’, ‘순탄’ 같은 단어들이 내 삶에서 사라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내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긴 시간이 내 인생에 남아 있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이사를 했다. 진심으로 이 집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길, 웃을 일만 가득 생기길 바란다. 그런 간절함을 집을 통해 품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제까지의 삶이 괜찮았던 거라고 -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지만, 억지로 이유를 찾아서 나를 달랜다. 그리고, 잠실집에서 살던 그분,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