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지구는 아파도 다시 사랑하는 걸> 연재 뒷 이야기_6화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갈등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못하게 될 경우, 갈등은 그 순간 시작된다. 다음과 같은 갈등은 어떨까?
하기 싫은 일이 있다. 안 하면 그만인 경우는? '싫다'라는 고백만 내뱉고 지나치면 문제없다. 갈등을 시작하는 이유는? 하기 싫은 일 자체가 바로 '해야 하는 일'인 경우다.
여기에, 더 어이없는 설정이 아래 경우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일'로 규칙을 정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인 경우다. 코찔찔이 '영구'같다. '영구 없다'라는 80년대 유행어를 만들어낸 영구다. 한국의 '찰리채플린'처럼 역할을 해낸 심형래선생님의 캐릭터. 영구가 인기 많았던 것은 다만 재밌는 연기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공감력도 영구 캐릭터의 생명력이었다.
미련퉁이 같은 속성은 우리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내면의 부분이니까. 그런 내면, 성향 그리고 습관 등을 과장되게 표현해주는 게 영구였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이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영구라는 캐릭터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바보성'이 공감을 누릴 뿐 아니라,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음'까지 주면서 승화의 단계로 이른다.
그러면서 보는 이들은 안도하는 것이 아닐까?
'영구 봐봐. 사랑받잖아. 내 안에 있는 '영구'는 그래도 저거보다는 낫지. 괜찮을 거야. 휴~ 안심이다.'
글을 쓸 때 직면하는 나는 '영구'보다 심하다.
영구 안에는 바보성만 존재하지, '악함', '수치심', '부끄러움', '욕심', '낙망'...
셀 수 없이 나열 가능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단어의 속성은 없을테니까.
영구가 악하다? 영구가 수치심을 느낀다? 욕심 많은 영구? 영구는 코를 흘리더니 낙망했다?
전혀 안 어울린다.
영구 + 위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야 했다.
'나를 직면하는 시간'이 글 쓰는 시간인데 위의 감정들과 씨름하기도 한다.
차라리 내가 똥 싼 얘기, 내가 선을 넘은 얘기를 한다고 했으면
지난 2주 가까이 느껴 온 갈등이나 어려움은 줄었을 것이다.
지난 <놀아본 사람들_엄마의 남사친>이라는 주제는 나를 직면하는 시간 내내 어려웠다. 고달펐다.
쉽지 않게 써내리다 보니 부족한 글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까지 치솟는다.
"아~ 아 ㅠ.ㅠ"
Ah ~ 진심이다. 이 작품 끝내고 나면, 나는 정말 <행복한 이야기>만 쓰고 싶다.
* 돈이 마구 들어와서 떼 돈 벌고 착한 일에 팍팍 쓰는 이야기 >> 자선가 허니 회장님 (장발장 같은)
* 눈이 대빵 크고 인기 너무 많은데,
그 상대남자들이 모두 공유, 이동욱 수준인 로맨스 이야기>> 로맨스는 허니 체질
(애니 '캔디'같은; 의붓가족 다 삭제함)
* 한 도시를 구원하고 '악'에서 한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는 스토리>> 원더우먼 허니 (갤 가돗 출연작쯤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이 수두룩하다.
내가 존경하는 저자 중 의외의 사람이 있다.
국부론을 써 내린 "애덤 스미스"다. 이 분은 문학을 쓰신 것도,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신 분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분이 쓰신 많은 글이 나는 좋다. 과학자들 중에도 있다. '파인만', '제인구달'이다. ‘찰리채플린'도 책을 쓰셨다. 이 분 이야기는 예상외로 슬프고 힘들었다. '간디'의 글은 도덕 수업보다 더 지루했다.
‘정약용'선생님 글은 뿌듯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분들은 모두 ‘글을 쓰셨다.‘
그분들의 글이 나에게 좋았던 이유는 글쓰기 이전에 그분들의 삶이 위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질문을 던진다. 수시로.
'어떻게 쓸 거야? 네 생각은 뭐야? 왜 그렇게 쓰려고 해? 뭘 얻고 싶어?'
끊임없는 자문자답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해 간다.
결국 울었다.
광역버스 안이었는데 다음 질문들에 눈물이 터졌다.
'그 시절 그게 그렇게 힘들었으면, 어릴 때 이야기를 시작하지. 왜 그때는 안했어? 힘들다고 하지.
덮어둔 채 다 괜찮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바람만 살살 불어와도 덮어둔 밑낯이 나올 새라 긴장하는 거 아닐까? 여전히 꺼내기 쉽지 않잖아?
뭘 지켜 드리고 싶은 거야? 충분히 미워는 해봤어?
어떻게 무얼 바꾸고 싶은 거야?'
‘이제는 말해 ~ 힘들면 그냥 말하라구.’
길거리를 지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서로의 나이를 짐작하는 사람들끼리 무심결에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중년의 얼굴들은 서로 안다.
’우리에게 웃을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나 봐요.‘
상대의 얼굴에 심술이 보이기도 하고, 걱정이 잔뜩 드리워져 있고, 지침이 부침인 삶이겠구나 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 얼굴을 보곤 한다. 중년의 나이가 그럴 수 있다. 웃음뿐 아니다.
눈물도 점점 준다. 나의 경우는 줄었다. 실컷 운다 해서 현실에 대한 해결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덕분에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어릴 때야 울면, 새 기저귀도 나오고, 용돈도 나오고, 친구들끼리만 떠나는 여행 같은 일에 허락도 떨어졌다. 회사 면접 때부터 였을 것이다. 면접 때 울컥하는 심정을 드러내어 울면 오히려 '삐~!'라는 결론이 난다. ‘쟤는 안쓰럽긴 한데, 어떻게 쟤를 고용해? 탈락!'이라는 결과가 뻔하다.
'눈물 뚝!' 의 태도가 세상 살이 비결이라는 걸 깨닫는 시기다. 그러다 보니, 울 일이 점점 없어졌다. 그런데 며칠 전 버스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니, 반가웠다.
'허니님은 이제 회춘하셨어요. 감성 지수 = 20대 꽃다울 나이입니다.'라는 헤드뉴스라도 보는 것처럼 내심 흐르는 눈물이 반가웠다. 버스 타고 갈 시간이 충분하니까 충분히 울자 싶어 계속 울었다.
속이 후련했다.
내릴 정거장 다다르기 한 두 정거장 전에 나는 눈 주변을 닦았다. 시원한 마음으로 내리려는데 옆자리의 외국인이 난처한 얼굴로 가방을 뒤지고, 가방에서 모두 꺼내놓은 짐을 뒤지고, 조용하게 법석을 떨었다.
얼굴이 곧 울 기세였다.
"Are you finding your card?"
위의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를 통해 그녀의 사태를 파악했다. 다음 바로 버스 기사님과 대화를 했다.
"기사님 여기 이 친구가 카드를 못 찾았나 봐요. 여기서 조금 더 정차를 해 주세요." 라며 기사님 옆으로 갔다. 기사님 오른쪽으로 바로 뒷 좌석에 카드로 보이는 플라스틱을 발견하고
"Is it yours?"
그녀는 그녀의 카드를 찾았고 나는 나의 감성을 찾았다.
물론 울고 난 후에 갑자기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내일 먹으려고 사둔 ‘샐러드 도시락과 프레쩰 브레드'쇼핑백도 떠나 버린 버스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 허무함때문에 버스에 내려서도 갈 길을 못 찾는 외쿡 사람 그녀를 혼자서 살짝 흘겨봤다. ㅎㅎ
'뭘 찾은 거야?'
'그래 감수성과 Kindness 만 챙겼으면 돼.'
남은 이야기도 있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니, 중요한 관계에 금이 생겨 잠을 못 자는 밤도 생겼다.
또 다른 관계들에서는 혼자만의 마음에서 삐긋거렸다. 상대가 상대 편한 대로 카톡 하는 것 같고, 일 추진 성향이 나의 심기를 조금만 건드려도, 나또한 ‘일'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독적 감정'이 자주 나를 자극하고 시험했다.
이럴 때는 정말 '사라져 버리고 싶다.‘
차분하게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목적지향적인 나의 단점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목적에 사로 잡히면, 그 목적에 맞지 않는 것에 여유가 없어진다.
없어진 여유를 가지고, 관계를 하다 보면, 관계의 소중함 보다는 '나 자신'을 보호하고 배려받고 싶어 진다.
쭈삣쭈삣, 삐끗거리는 내면 상태로 또 잠을 설친다.
마감일 전 하루 이틀은 그렇다.
ㅎㅎㅎ
일단 작은 미소로 여유를 가져 보자.
고백을 남겼으니, 기도하며 다시 항해하자.
이왕 쓰는 것
목표는 '위대한 작가'로...
(’위대한 캐츠비'가 에드립처럼 떠오른다. ㅎㅎ)
위대했나? 캐츠비? ㅎㅎ
영구보다 더?
https://brunch.co.kr/brunchbook/earth-lo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