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씹어 읽기 _ 0071624
읽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더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다,
읽은 대로 살아낸다면?
얼마나 놀랍고 기적적이며 사랑스러운 삶을 살게 될까요?
맛난 음식을 꼭꼭 씹어 먹으면
그 음식이 이제 곧 우리가 될 것입니다.
읽은 것을 꼭꼭 씹어 다가올 '새로운 나'로 만드는 시도와 애정을 가져보겠습니다.
틈틈이.
어떤 기적이 벌어질지는 곧 알게 되겠죠.
잘된 밥,
잘된 글,
꼭꼭 씹어 먹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행복'이 쌓일 텐데요.
그러니, 해보겠습니다.
빙그레 ~
과거의 스토리를 거듭 반복해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라. 그러면 점점 성숙해지면서 가장 힘겨웠던 순간들마저 경외심과 기쁨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
그 순간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불혹'이라는 나이 즈음에 그 원망이 설움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원망을 품었던 그분들을 향한 저의 해석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그걸 깨닫지 못한 저는 그분들이 잘못했다 생각했습니다.
미워졌습니다.
속았다 생각하니, 그들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가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존재는 달라집니다.
사람관계뿐 아닙니다.
단어의 정의도 동일합니다.
현시대에서는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해석과 반응이 자유로워집니다.
'청춘'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대개는 10대 후반부터 20대의 친구님들을 가리킵니다. +@로 30대 초반까지 '청춘'의 영역에 넣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정의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아프면' 청춘이고, 본인이 청춘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50대 명함 앞에도 '청춘'을 붙일 수 있습니다. 나이테는 상관없습니다. '가능성을 가진 사람', '도전 정신으로 끝없이 시도하되 시행착오를 이겨내는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과 차이나는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즐기며 탐험하는 사람' 등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청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겠죠.
그 방을 흐르는 눈물로 꽉 채울 기세로 울고 있던 허니는 '불혹'을 또 하나의 '청춘'으로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이로 정의한 '청춘+@+남은@'시간만 생각했습니다. 20~30대를 한 단체의 미션에 순수하게 불태웠습니다. 80년대 학생 운동가들처럼 공동체가 추구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함께 하며 따랐습니다. 모든 열정, 에너지, 시간과 결국 미래까지 남김없이 모아 리더들이 제시한 비전에 따라 숨 쉬고 잠들고 먹었습니다.
모든 성장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리더의 가르침과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성장이 진행되면 독립하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앞 세대와 분리된 건강한 분별력을 갖는 시기는 한 참 후에 가질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자녀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분리를 시작하기 위해 꿈틀거리고 갈등하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 그 시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분리되어야 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의 영적 독립의 시기는 그 방에서 전환점을 갖었다 생각합니다.
실망, 분노의 감정이 분리의 알람 신호로 사이렌을 울렸습니다.
토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쳐준 대로 살지 않아.
그들이 좋아하는 것도 결국 돈이야.
그러면 시작부터 그렇다고 했어야 해.
왜 그렇게 설교한 거야?
속내는 다르면서...
차라리 교육 끈이 짧은 부모님처럼
자신들의 삶 그대로 담아 얘기하고 표현하는 게 이로웠잖아.
혼자 섬에 살라는 거야?
그래... 다 똑같아.'
그분들이 가르쳐준 대로 자신들은 살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순간 '사기죄'로 그분들을 고소하고 싶다는 열정까지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갑자기 웃음이 나옵니다. ㅎㅎㅎ
당시에는 심판의 날이 너무 멀리 있다 느끼며 당장 고소할 방법이 없나 생각했습니다.
리더들의 삶에 대한 무리한 동경과 기대를 했던 것이었죠.
그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제 인생의 전체 스토리를 저는 모르지 않습니까? 그 스토리 속에 참 주인이라 지금도 믿고 있는 '신'에 대해 정말 부분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봉사 12명이 나가서 코끼리를 만지거나 연구해서 돌아와 수집한 정보로만 코끼리를 설명하려니 그게 안된 꼴입니다. 12명 중의 저는 오른쪽 발만 열심히 만지고 돌아와서 그것에 격하게 분노하며 '리더들이 말한 코끼리는 아니잖아. 코끼리에게 깔려서 압사당할 뻔했다'라고 울고 있던 모양새입니다. '고소'할 힘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속했던 공동체와 멀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소송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마치 자녀가 10대 20대까지 부모님 말씀 따라 순종 잘하면서 그분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내려 노력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에게서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관찰해 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라'라고 강요받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고요. 강요받았던 대략 20살까지의 인생과 이 잘못된 길을 바로 잡기 위해 앞으로 고치는 데 지불할 미래의 대략 1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에 대해 '고소'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도록'강요한 이후의 삶의 행복 혹은 불행은 온전히 제 몫이라는 것조차 억울했습니다.
부모님이나 리더들 모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이나 언어로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시인한다고 해서 제 노력이나 선택이 쉬워지고 책임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프니까 그랬을 겁니다.
여기저기 아파서였습니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지기 위해 '영혼의 재활 치료'같은 과정에서 느끼는 아픔이었다 생각합니다. 육체의 재활을 위해서도 일정 기간 깊이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고통스럽지만 그 시간을 꾸준히 통과해야 합니다. 끝날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더 자유롭고 강인해질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믿는 사람은 통과합니다.
저를 포함한 현대인의 마음과 영혼에도 이런 치료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그 여정 중에 있습니다. 그 골방에서는 욕심 많고 열정 많았던 제가 대략 18년 정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가 '언제 다 끝나?'냐고 '대체 끝은 있냐?'라고 투정 부리고 지쳐 나가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모든 상황과 주변 사람들을 삐툴어진 시각으로 보고 다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책임 전가하기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니까요. 그분들도 미래를 알까요?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길에서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이웃입니다. 아침에는 착한 마음 갖었다가 5분 사이에 화라는 감정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고요. 서로 다 부분밖에 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분들도 자신의 짐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그냥 한 사람'이었음을 깨달아 갑니다.
부모님이던 어떤 리더로서 무엇을 전달하였던 지금은 해석합니다.
You are my best!
의사를 찾아가서 '병'을 검진받았다고 가정해 봅니다.
의사가 검진하고 객관화된 진료와 치료 방법을 권유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정작 그 병에 대해 본인의 치료 방식대로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암'에 관해서 의사들의 경우 '암'진단을 받으면 병원에서 치료받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이나 집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남은 시간 다른 일을 선택하는 의사를 찾아가 고소할 수 있을까요? 암 전문의라는 권위를 믿고 찾아간 환자로서의 목적은 치유였습니다.
의사의 삶을 신의 위치에서 판단하고 점검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 관찰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
당시 제가 그 공동체에서 유난스러운 헌신을 한 배경이 있습니다.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살아야 할 목적이 더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외에 한 두 가지 의문점이 풀리고 나면 그 후에 '최종 선택'을 하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자살'이라는 행위도 죽음을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최종적 선택인데 따질 건 다 따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쇼핑이라면 잘못 된다 해도, 잃어 봐야 기껏 몇 만 원에서 수 십억 원입니다. 이 선택은 그 뒤에 되돌릴 방법도 딱히 없는 선택입니다. 따지면서 이리 저리 찾아 보면서 만난 단체였습니다.
목적은?
제 삶의 의미를 재 발견하고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장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보다 정말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자살'따위는 '왜 해야 하나?' 쯤으로 바뀌었습니다. 행복은 자주 느낍니다. 글을 쓰면서 늦점도 했습니다. 점심 메뉴와 함께 떠오른 생각입니다.
'아마씨, 호두, 호밀 등의 잡곡이 송골송골 들어간 파리바게트 호밀 불라불라 식빵 2장 먹을까? 1장 먹을까? 여기 요렇게 펼쳐진 5g용 버터(버러~) 패키지 용지에 부드럽게 흐르는 버터의 남은 양을 보소. 보소. 예라이~ 2장 먹어주지. 행복하잖아. 역시 텐퍼센트 아이스라떼는 맛이 괜찮아. 갓성비의 맛이쥐. 오후 3시 전이라서 500원도 아꼈어. 3시 넘으면 디카페인 주문해야 잖아. 큰 행복이야. 내일도 살아야겠어. 더 맛있는 것들이 세상에 이미 너무 많이 존재해. 그런데다 또 개발되어 나오잖아. 놓쳐서는 안 돼.'
갑자기 이생 너머의, 상상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the SYSTEM' 혹은 'Heaven'에서 연락을 급히 주신다면? 브런치 글 몇 개 포스팅한 거 외에 딱히 잘 남겨둔 게 없네요. 그래서 망설일까요?
부끄러운 현실이긴 하지만, 저는?
"Oh Yeah ~ 고 고!"
얼마 전 이루지 못한 꿈이 많다며 '초기 암'을 걱정하시더니? 당장 가신다고요? 라실 수 있지만요.
그건 아픈 상태로 남은 인생을 고단하게 사는 상황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제가 정말 원하는 삶의 에너지와 다른 에너지 상태로 사는 삶이니까요. 제가 믿는 이생 너머의 '시스템'은 고통이 없는 세계입니다.
가본 적이 없어서 확인한 바 없어서 단순히 믿습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 또 다른 '고소'장을 쓰겠다며, 수작을 부리고 있을까요?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행복하겠습니다.
지금 행복하다 보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은 조금 더 쉬워질 겁니다.
여기서 매 순간 쉽게 찾다 보면 '시스템'이 다른 이상 세계에서도 쉬워질 겁니다.
안 가본 세계일수록 믿어서 얻어지는 유익은 큽니다.
걱정해서 얻어질 유익은 작아 보입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씹어 먹을 책 구절 덕분에, 저의 아팠던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나의 20-30대 열정을 태웠던 시간은 귀했다.
잘했다. 그렇게 했더니 '자살' '우울' '염세주의'는 다 나았다.
행복을 알고 꿈을 발견했다.
나를 인도해 주셨던 그분들 모두 완전하지 않았다.
완벽할 이유도 없다.
완벽을 요구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나에게 그분들은 최고의 스승들이셨다.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아낸 분들이다."
앞으로 더 행복해지겠습니다.
참고서적 : 퓨처 셀프
지은이 : 벤저민 하디
옮긴 이 : 최은아
그림 참고 서적 : I talk like a river
글 : Jordan Scott
그림 : Sydney Sm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