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현실만이 진짜일까?
*뇌과학자 김대식 님의 <메타버스 사피엔스(동아시아출판사)>를 읽고 썼습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 님을 모티브로 20년 후 미래, 루게릭환자가 메타버스 세상으로 이주한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해보았습니다.
안녕, 보고 싶은 내 친구 희수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일흔 살 축하해. 생일을 기념해 홀로그램으로 축하 편지를 보내. 그간 안부를 전하지 못했네. 내가 이곳 메타버스로 불리는 디지털 세상에 이주해 온지도 벌써 20년이 지났구나.
며칠 전 네 딸 미정이가 나를 찾아왔어. 메타버스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너를 좀 만나달라고 하더라. 네가 집에서 종일 무기력하게 누워 지내시는 게 너무 속상하다고.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아버지도 메타버스에서 친구도 만나고 하고 싶었던 일도 하시자’고 여러 번 설득했지만, 네가 도통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눈물을 훔치더라.
일단은 타일러 보냈어. 효녀인 미정이의 마음은 잘 알지만, X세대인 우리는 사실 아날로그가 좀 더 익숙하잖아. 미정인 그래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현실을 모두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세대지만 네가 디지털 세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말이야. 알고 있겠지만 딸로서 아버지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싶었던 거겠지.
미정이가 가고 나서 내내 마음이 무겁더라. 마흔다섯 살까지 농구 코트에서 현역을 뛰었을 만큼 쾌활하고 건강했던 네가 외로움을 타고 노쇠해지다니 마음이 너무 아팠어. 20년 전 내 모습이 다시 떠올랐어. 그 마음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거든.
그래서 내가 왜 디지털 세상에서 살기로 결심했는지 너에게 얘기하고 싶었어. 너도 알다시피 아날로그 세상에서 나는 루게릭병 환자였지. 추운 것도 더운 것도 배고프고 배부른 것도 남들과 똑같았지만,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던 아득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어. 20년간 몸의 감옥에 갇혀 고독하고 무기력했던 나에게, 메타버스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자 새롭게 펼쳐진 또 다른 삶이었어.
이곳에서 나는 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 일과 한번 들어볼래? 아침에는 새소리와 따뜻한 햇살, 귤밭의 싱그러운 냄새를 맡으며 제주도 둘레길을 산책하고, 오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보고 싶었던 모나리자를 코 앞에서 관람하지. 그리고 저녁에는 호주 오페라 하우스에서 황홀한 공연을 감상해.
침대에 묶여 누워있을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짜릿한 일이지.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아날로그 현실에서는 내 몸이 위치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경험할 수 있었지만, 여기는 이동의 제약이 없거든. 점프만 하면 돼. 내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어.
디지털 현실에서의 몸을 아바타라고 하는데, 내 아바타 중 하나는 농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어. 아프기 전에는 내가 농구를 조금 했잖아. 서른한 살 때 최연소 코치로 발탁되자마자 손가락 발가락이 굳어가는 증상이 나타나 삼 개월 만에 감독직을 내려놓았어야 했지. 여기서 못다 이룬 꿈을 다시 이어가고 있어.
물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아쉬운 점도 있어.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쉬우면서도 균형 잡힌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아. 며칠 전 대규모 시위가 있어. 메타휴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로 서로 대치했지.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 전혀 대화하거나 토론하지를 않아. 서로 자기 말만 하고 논리를 강화해갈뿐이야. 사람들을 부추기는 미디어는 더 심각해.
안 그래도 편 가르고 자기 편한 대로 믿는 게 사람의 본성인데, 선별된 정보만을 보다 보니 갇혀 버리게 되는 거야. 세상을 아주 다르게 보는 것을 넘어서 전혀 다른 다중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서로가 전혀 다른 세계에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 나도 이제는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어.
참, 내 모습 어때?
스무 살 때 내 모습을 생성적 적대 신경망 GAN 알고리즘으로 만든 아바타야. 알다시피 내가 좀 잘 생겼었잖아. 내 첫 번째 아바타는 그래픽이 영 어색했는데, 점점 정교해져서 지금의 아흔일곱 번째 아바타는 아날로그 현실일 때의 나보다 더 생기 넘치는 것 같아. 스무 살 때 잠깐 났던 여드름까지 재현이 돼서, 그건 살짝 지웠어.
새로운 삶을 나는 다양한 아바타를 가지고 있어. 식당에 가는 나는 정우성을 좀 닮았고, 여행을 갈 때의 나는 송중기를 조금 닮았어. 내 얼굴이 맘에 안 들어서가 아니야! 여기는 훈남훈녀가 너무 많아. 조금 상향 평준화 됐달까? 얼마 전 메타휴먼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매력이 넘치는지 몰라. 아, 메타휴먼은 나처럼 아날로그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디지털에서 탄생한, 인공지능 휴먼이야.
이 소개를 빼놓을 수가 없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식당이야.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을 필요는 없지만, 향과 식감을 기가 막히게 재현해 내 거든. 나는 과자를 먹을 때가 제일 좋아. 바삭바삭 씹는 맛이 좋은 소라 과자, 달짝지근한 고구마깡을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 그때는 내가 커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했잖아. 식도로 넘어가야 할 커피가 기도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생사를 오가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가족들과 다시 얘기 나누고 시간을 보내게 된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우리 가족들은 이미 10년 전 이주해 왔어. 조카 손주인 준영이까지도! 처음엔 다들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아하더니 이제는 각자 자기 삶을 사느라 바빠. 우리 가족들도 아날로그 현실에서는 나를 돌보느라 삶을 포기해야 했으니까 내가 양보해야겠지?
준영이는 다섯 살 때부터 이곳에 왔는데, 현실에서 지내는 것보다 여기서 지내는 게 더 편한가 봐. 요즘엔 농구에 관심이 많아져서 자기 친구들보다 나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 기특해서 준영이에게 한국 국가대표 선수를 해보라고 조언했는데, 자기는 지구인이라 꼭 한국에서 국가대표를 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대. 요즘 애들이란.
20년 전 내가 이곳에 온다고 했을 때 네가 극구 말렸던 게 기억나. 뇌에 있는 데이터를 코딩화해서 가상현실에 업로드하는 프로젝트에 내가 신청했을 때, 너는 내가 안락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슬퍼했었지. 가상현실 세계는 ‘진짜’ 현실이 아니고, 가상현실 속 아바타는 진짜가 내가 아니라고 했지. 곧 치료제가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만류했었어.
어쩌면 지금도 너는 이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희수야. 진짜 산다는 건 뭘까? 좋아하는 고기를 소화시키기도 힘들고 무릎도 내 몸 같지 않고 말이야. 나는 그냥 하루하루 나답게 살고 싶었어. 나에게는 몸이라는 어두 컴컴한 감옥 안에서 지냈던 지난 20년 보다 메타버스에서의 20년이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또 다른 삶에서 가장 기쁜 건 내가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거야. 아날로그 현실에서 내가 가장 슬펐던 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줄 수 없다는 거였거든. 너를 본다면, 실컷 웃어주고 이야기하고 안아주고 싶어. 그러니 친구야, 나를 보러 한번 놀러 오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