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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 되어야 함을

by 노미화


나는 그 아이가 유난히 고집이 센 줄로만 알았다. 강사 시절, 십 년도 더 지난 그때 이야기다.


"매번 숙제도 안 하고, 수업도 건성으로 듣고, 문제 하나 안 풀고 앉아있을 거면 차라리 오지 마!"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게 나갔다. 뒤돌아서는 순간, 희미하게 들린 목소리가 내 귀에 닿았다.



"지랄하네..."



순간 멈춰 섰다. 뒤를 돌아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 아이도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봤다. 15살의 반항과 28살 어른이 가진 어설픈 권위 사이의 팽팽한 기싸움이었을까. 사방의 눈들이 동그레 지며 깜빡이는 움직임들이 감지됐다. 뒤를 돌아보지 말걸, 들어도 안 들리는 척을 해야 했었나, 아니면 정말 눈물 콧물 다 쏟게 만들어야 하나, 돌아서 아이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오만 감정이 올라왔다. 정말 '지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며, 좋은 소리든 싫은 소리든 온갖 잔소리를 듣고, 꾸역꾸역 공부해서 몇 점이라도 올리려는 그 현실이 참 지랄 맞았다. 하기는 싫지만 결국은 잘하고 싶어 학원에 온 아이들.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 그들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지 못한 채, 똑바로 해라, 틀리지 마라, 왜 이해를 못 하냐며 다그치던 내가 참 지랄 맞았다.



소통의 부재.
교육제도와 현실.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사람과의 관계.



그때 결심했다. 나중에라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하게 된다면, 조금 노선을 벗어나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을 더 헤아려주고 진짜 공부를 하게끔 도와주고 싶다고. 15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잔소리도 여전하고.



“야, 그거 애들 버릇없어져. 그냥 빡세게 돌려.”


“아니,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더라. 좀 힘들어할 때 끌어주고, 잘할 때는 또 우쭈쭈 해주고, 버릇없을 때 눈물 쏙 빠지게 혼쭐도 내주고, 무기력할 때 나는 너를 믿는다는 응원가 득한 진심을 내 보이니까 아이들은 자연스레 권위를 세워주더라. 권위는 내가 억압해서 세우는 게 아니라 아이들 마음에서부터 권위가 만들어지더라.”


“권위? 야, 그거 만만하게 보는 거야! 그냥 수업비 받으면 모르는 거 잘 가르쳐주고 시험 잘 나오게 하면 되는 거지. 사교육이 그런 거 아냐?”


“그치, 수업비 받고 모르는 거 잘 가르쳐주고 그러면 되지. 그런데, 애들은 선생이 싫으면 잘 가르쳐줘도 잘 못 받아먹어. 사교육이 그런 거 아니냐고? 그런 거면 나 이거 안 해. 재미없잖아. 아직 애들이잖아. 못하는 놈도 잘한다. 오늘은 더 잘하네. 내일은 더 잘할 거야 라고 하면 쌩글쌩글 웃어가면서 하더라. 숙제 안 해오는 놈도 ‘나는 니가 해올 거라 믿는다.’하다가 한번 해오면 말도 안 되게 오버해 가며 폭풍칭찬을 하는 거야. 너는 역시 뭐라도 될 놈이다라고 하면서 말이지. 그러면 애들이 ‘그런가? 내가?’ 하면서 지 스스로 머릿속에 톱니바퀴를 돌리는 거지.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조금 삐거덕 거리겠지만 저절로 돌아가져. 권위가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책임지고 애들을 가르쳤을 때, 아이들이 웃으면서 잘 따라오고, 모르는 거 따박따박 묻고, 숙제 잘해오고, 투덜대도 할 거 다 하게 만드는 힘 같은 게 아닐까. 꼭 필요하지 그런 권위라면 말이야. 결과가 다르거든. 비록 상황이 지랄 맞을 때가 있더라도.”



“니는 뭐 성인군자가? 얼마나 되바라진 애들이 많은데.”


“원비 들어오잖아! 사교육이 그런 거라며!”





내 새끼를 키워보니 알겠더라. 나는 ’ 갑‘이 아니고 ’을‘이 되어야 함을, 믿고 기다려야 함을’








(인스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학원 오픈에 관한 게시물을 올릴 때, 십오 년 전 제 뒤통수에다 대고 ‘지랄한다’는 말을 날렸던 아이가 댓글을 남겼다.


‘선생님, 제가 그때는 철이 없어서 선생님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저 수학과 올해 졸업했어요’라고. 고마웠다. 내가 그 밑에다가 뭐라고 답을 달았는지 기억이 안 나서 댓글을 찾으려고 했는데, 찾다 찾다 결국은 못 찾았다. ‘아니다’‘괜찮다’라는 말 말고 다른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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