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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는 삶

by 노미화

‘다 때가 있어요’라는 말을 왜곡했었다.


지난 주말, 어느 시인의 북토크에 갔다.

“나는 말이든 글이든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나 싶은 자격지심이 들기도 하고, 타인의 글이나 말에서,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나를 온전히 드러내는 글과 말에 피로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에세이라는 장르는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죠.”

그런 시인의 테이블 위에는 출간된 에세이 두 권과 시집 한 권이 올라와있다. 나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시인은 현재와 제법 시간을 둔, 오래전 과거의 조각들을 떠올리고서야, 쓰기 힘들었던 에세이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고 했다. 어떤 사건 혹은 이야기에 대한 거리확보, 시간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어느 정도의 시간의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어떤 것이 나온다는 시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인지적 부조화가 일어난다.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서두름의 맥락 속에서 시간확보라는 것이 과연 익어가는 것일지, 도태되는 것일지. 우리는 그것을 끈기라 말할까 아니면 미루는 행위라 말할까. 행위의 축적은 정말 때가 있는 것일까. 때를 잡아야 하는 것일까.



행위는 축약되어 반응이 된다. 경험은 옅어져 체험이 된다. 느낌은 빈곤해져 감정이나 흥분이 된다. 우리는 오로지 관조적인 주의注意 앞에서만 열리는 실재에 접근하지 못한다.(p24)
한병철 <관조하는 삶>중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때로는 시간을 견뎌내며, 가끔은 현타가 오겠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삶을 살아내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떻게든 나의 방식으로 갈무리할 수 있다면 나도 확보된 시간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때'가 당도할까. 나의 조급함만 버린다면 정말 가능할까.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은 잃은 듯한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증표가 우리에게 도달한다. 당신은 모든 문을 두드렸지만 부질없었다. 그러나 당신이 드디어 설 수 있는 문, 백 년 동안 헛되이 찾아온 단 하나의 문을 그런 문인 줄도 모르는 채로 당신은 두드리고, 그때 문이 열린다.
한병철 <관조하는 삶>중에서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자극은 완전히 피할 수가 없다.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 배짱도 없고. 이미 삶의 많은 부분에 들어와 본질인척 하고 살고 있는 그것들과 나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모호하다면 모호하고 신중하다면 제법 신중한 나이기에 '관조'라는 옷을 '미루기'에 입혀 '때를 기다리는 척'할 수밖에. 가끔씩 오는 현타를 슬럼프라고 부르며.



'다 때가 있어요'라는 말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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