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써도 괜찮아
수필이란 하고 싶은 대로 자기를 표현하는 글이다. 논조(論條)를 밝히고 형식을 차릴 것 없이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글로, 한 감상, 한 소회, 한 의견이 문득 솟아오를 때, 설명으로든 묘사로든,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글이다.
단적이요 트여 있어서 글쓴이의 됨됨이가 첫마디부터 드러나는 글이 수필이다.
누구에게나 수필은 심적 나체다.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삐딱하게 쓰기
사람의 됨됨이가 첫마디부터 드러난다니. 체면치레로 쓰고 있는 가면을 벗으려는 손이 흠칫 놀란다. 가면 안에 있던 얼굴이 당황하고 난감해진다. 저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나 보다. 마음 같아선 체면이고 뭐고 간에 손에 있는 가면을 내동댕이치고 싶다. 그냥 맨얼굴로 쌩얼굴로 ‘이게 나요’라며 자라목 빼듯 빼고 다니고 싶다. 다시 가면을 쓰자니 영 불편하다. 나를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완전히 들키는 건 또 싫다. 에세이의 첫 문장은 그 사람의 얼굴이지 태도고, 어쩌면 그 사람의 마음속 골짜기까지도 드러난다? 모두가 궁예란 말인가. 내 글의 첫 줄을 보고 내 속내를 꿰뚫어 본다고?
하지만 솔직해지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렇게 삐딱하게, 슬며시 말문을 연다. 오늘은 연재북의 마지막 꼭지니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의 제목에 딱 맞게 정말 아무거나 한번 써보기로 한다.
나는 요즘 삐딱하다. 아니, 삐딱하게 굴고 싶다. 왜 그렇까. 내가 옳다고 믿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확신에 스스로가 더 작아지는 기분 때문일까. 아니면 사실은 내가 맞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올바름이 더 거슬리는 걸까. 괜히 뾰족해지는 마음. 좀 피곤한 사람. 둥글고 다정한 가면을 쓰면서 가면 속에서 입을 삐죽거리는 나란 인간.
“사람은 다 비슷해.” 이 말이 때로는 위안을 주지만, 어떨 땐 그저 자기 합리화처럼 느껴진다.
“너도 삐딱해? 나도 삐딱해! 야, 너두.” 이 얼마나 합리적인 ‘으쌰으쌰 우리는 하나!’ 메커니즘인가. 그렇게 서로가 가까워진다고 믿는 건 아닐까.
오늘의 글은 정말 산만하고 삐딱하다. 에세이, 산문이란 건 생각이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가는 거라지만, 그 안에 ‘자기의 미’가 담겨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오늘처럼 이렇게 푹 쏟아낸 글이 과연 아름다울까. 누가 봐도 아니지. 이 날뛰는 말들, 이 날것의 감정들. 어떻게 정지시키고, 어떻게 정제할 수 있을까. 나는 종종 실패한다. 고르고 고른 멋지고 예쁜 말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그 이질감에 헛웃음이 날 때도 많다. 남에게 가닿는 글이라 했던가. 한 달 사이 내 앞머리와 옆머리에 흰머리가 제법 많이 올라온 걸 보니, 나는 부단히도 나답지 않은 문장과 단어를 찾아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나 싶다.
그래서 그런 걸까. 나는 문장 끝에 ‘뭔가’를 자꾸 덧붙이게 된다. 말이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괜히 말랑한 장식을 단다. 너무 날카롭게 들릴까 봐, 말끝을 살짝 굴리고 둥글게 말아버린다. 마침표 뒤에 오는 이모지처럼. 그건 마치 말에 리본을 다는 일이다. 속은 그대로, 겉만 곱게 다듬는 일. 차가운 속내가 들키지 않게 천을 씌우고 다정하고 무해해 보이게끔 포장해서 내민다.
스스로 북북 찢어버릴 포장지.
진심은 부담스럽고, 솔직함은 성가시니까. 그러니 말의 마침표 뒤에 웃는 표정 하나쯤 붙여 둔다. 그러면 아무 말도 아닌 말도 그럴듯해지니까. 진심인 척할 수 있으니까. 나도, 당신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니 마음이 삐딱해진다. 아니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일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세상일까. 삐뚤어진 세상에 삐뚤어진 마음을 끼워 맞춘다. 모양 맞추기 장난감처럼 툭, 쑥, 뿅. 맞아떨어지는 그 모양이, 기가 막히게 또 나와 같다.
너무 잘 들어간다. 기분 나쁠 정도로.
[연재 브런치북]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를 30회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목차가 30개밖에 안되는걸 오늘 알았네요)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연재 브런치북]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 2를 연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