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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죽는 아이

침묵의 방관자

by 노미화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클레이 키컨 <이처럼 사소한 것들>중에서


이것은 펄롱의 자멸적 용기가 불을 지핀 나의 학창 시절 기억 속에 남은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이것은 부끄러운 고백이기도 하다.



매일 죽는 아이


그 아이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마치 안개처럼 형체 없이 교실에 스며들어 있었다.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걸까. 왜 그랬을까. 어눌한 말투, 가는 목소리가 입술에서 겨우 새어 나왔다. 고개를 숙인 얼굴에서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고,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다. 생기 넘치는 부산한 틈 속에서 섞이지 못한 불안한 고요함. 그 모습이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신호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무리들은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는 우리와 다르다’


그 차가운 신호는 안개를 걷어내듯, 그 아이를 또렷하게 고립시켰다. 따돌림의 신호.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놀이처럼 번지고, 역병처럼 자리 잡았다. 무서웠다. 그 감기 같은 조롱과 외면이 나에게도 옮겨 붙을까 봐 두려웠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 아직 어리고 약하다는 변명으로, 그렇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탈을 쓰며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걸리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망상을 할 만큼 어리고 미숙했다. 잔인함이 잔인한 줄도 몰랐다. 정말 몰랐을까. 그 철없는 잔인함의 무게가 그 아이의 어깨를 더 짓눌렀다. 아니, 어쩌면 존재자체가 사라지는 고통이었을까. 매일 조금씩. 말 대신 침묵으로, 시선을 피해 고개 숙임으로, 존재 대신 그림자로. 나는 그걸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방관자.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라고 말하지만 결국 차별과 따돌림에 일조한 아이들과 나.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했던 그때의 나. 수군대는 무리들의 목소리가 그 아이를 더 작게 만들 때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나도 같이 무시당하고 멸시당할 거라는 왜곡된 두려움이 있었으니까. 희미한 존재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게, 내 존재까지 위태롭게 만들거라 생각했으니까. 무시와 멸시 속에 그 아이의 어깨는 더 움츠러 들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방관의 투명망토를 뒤집어썼다.


문학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웠으며, 존중과 배려를 배웠던 그 작은 교실에서, 우리는 한 아이가 매일 죽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 당시 나는 한 번도 그 아이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묵과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닫는다.


잠시, 그 아이가 되어 본다. 그 아이의 시간에 나를 겹쳐본다. 아, 너무나 이기적인 빙의인가.


시끄러운 교실 안, 내 자리는 늘 고요하다. 햇빛이 닿지 않는 4 분단 두 번째 줄 오른쪽 자리, 내 자리는 늘 어두웠다. 내가 앉은자리는 그냥 '자리'가 아니라 친구들이 시선을 두지 않는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 일 없을 '공간'이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그 눈은 금세 도망쳤고, 내가 입을 열면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내 주변의 공기만 흔들렸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불편함'이었을까. 불편함도 못 느끼는 '무관심'이었을까. 웅성이는 목소리들이 나를 둘러싼다. 무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으로 대신하던 시간들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손을 내밀면 허공을 가를 걸 알기에 나는 점점 나를 안으로 접어 넣는다. 어느 순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그렇게 나는 매일 나를 없애는 연습을 한다. 누군가는 제발 알아주길 바라며. 하루하루 조용히 죽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사라졌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투명했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면했다. 4 분단 두 번째 줄 오른쪽 자리. 빛도 안 드는 그 빈자리를 쳐다보고, 다시 보고, 또 보았다. 그 아이는 정말로 죽었구나. 아니, 이 교실에서 우리가 그 아이를 정말로 죽였구나.



사실 그 아이는 전학을 갔다. 그 사실에 안도했던 나는, 과연 진심으로 괜찮은 인간이었을까. 이것 또한 자기 합리화였을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는 아일린(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이 키건)의 말은 때때로 모호하고, 때때로 도덕적이지 않은 나의 부조리함이 여실 없이 드러나 두드려 맞는 대목이었다. 그 문장에서 나는, 부끄럽고 불편한 나의 그림자를 봤다. 많은 것들을 모른 척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때의 '모른 척'은 정당한 침묵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지워가는 과정에 가담한 비겁한 외면이었을 뿐.


가끔 그 아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새 학교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을까.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아무도 안갯속에 밀어 넣지 않는 곳에서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그 아이의 고통 속에 잠시 들어가 본다는 것이 자체가 어쩌면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빛 가운데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사랑받으며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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