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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11. 2024

파일명: 잡동사니

실패의 흔적 혹은 실패의 기록

‘내 애 교육이 제일 어렵다.’

‘솔직히 티오 없을 줄 알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완벽히 설명한다는 것’

‘학원에 전기세 내려 다니는 거 아니잖아’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기본만 하게 해 주세요’

‘속삭이는 것까지 다 들려’

‘책만 읽었던 바보, 나를 쓰기 시작했다’

‘차라리 물음표’

‘기억의 파편조각’

‘엄마’

‘아빠’

‘나의 가족’

……그 외 몇십 개의 파일들.     


 노트북 바탕화면에 ‘잡동사니’라는 이름의 폴더가 있다. 쓰다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아놓은 글들이 있다. 폴더를 클릭하여 창을 열어본다. 스크롤이 제법 길게 내려간다. 뭔가를 써보려고 시도했던 흔적들이 한글파일로 가지런히 각각의 이름을 달고 줄을 서있다. 두 세 페이지나 꽉꽉 채워놓고도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글, 자기도취로 점철된 가식적인 글, 유식한 척 써 본 지적허영심 가득한 글도 줄줄이 담겨 있다. 그뿐인가, 부끄러워서 쓰다만 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흔해 빠진 글, 너무나 속물스러운 글, 절제하지 못한 감정이 사방팔방 넘치는 글, 그래서 꺼내놓을 용기가 나지 않는 글. 다시 불러와 쓰려니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한 글들이라, 제목 그대로 ‘잡동사니’가 되어 폴더 안에 차곡차곡 쌓여버렸다. 버리자니 품을 들인 시간이 아깝고 쓰자니 낯 부끄러워서 꺼내 놓지 못할 계륵 같은 것들이었다.    

  

 얼마 전, 잡동사니 폴더로 들어간 파일 하나를 다시 열어봤다. 그 글은 최근에 쓴 것인데,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기억도 감정도 왜곡됨을 느꼈다. 쓰면서 마음이 꽤나 혼란스러웠다. ‘괴물 혹은 유령 혹은 환상’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문단이 바뀌고 첫 문장부터  꽤나 무겁게 시작되었다. ‘나는 피해자였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과거의 어느 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여 힘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기억과 감정들은 뒤섞여 불분명한 덩어리를 만들어냈고, 덜어낼 틈도 없이 깎아낼 틈도 없이 그대로 글이라는 형태로 바뀌는 듯했다. 마침표를 찍고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읽었다. 군데군데 가시가 돋아 삐죽삐죽한 글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으면 감정들부터 잘 다뤄야겠다 싶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괴물과 같은 감정을 글로 유려하게 풀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쓰기를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으로 쓴 글이 아니었기에 인격을 여실히 드러낸 그 글은 어쩌면 진짜 나의 감정들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아니었을까.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족에 대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에는 어김없이 막혔었다. 아무래도 과거와 현재의 괴리감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행복에 대한 어떤 ‘역경의 서사’라고 긍정의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다. 내 입으로 역경이라니 조금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가족을 떠올리면 나는 매번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두 모습의 가족이 떠오른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의 가족과 오로지 내가 선택하고 가꾼 지금의 가족. 분리시켜 이야기하는 것도 참 웃기고 모순이다. 이기적인 게 맞다. 두 가족의 모습을 철저히 분리하고 싶었던 나였으니. 외면이라는 단어도 후한 것 같았다. 내 삶에서 통으로 들어내고 싶은 과거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어떻게든 달아나려 해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도 희석되어 좋은 메시지를 건져 올릴 수 있을까. 누군가 나의 글을 보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찌르는 글이 아니길 바란다는 피드백이었다. 그 말을 깊이 담아두고 있다. 꼭 필요한 말이었다. 가시투성이로 쓴 글들을 보면서 더더욱 다짐했던 말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더는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지 않고, 나의 가족이야기를 담담하게, 투명하게, 당당하게 쓸 수 있도록 제대로 마주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다짐했다.    


 잡동사니 폴더에 쌓여가는 파일들이 바로 그런 실패의 흔적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과거의 내가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시절의 감정, 눈물, 그때의 분투, 간절한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지, 버리지도 취하지도 못한 파일들을 꺼내놓고 다시 폴더로 넣으며 매일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그 글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세면대에 물을 받아 놓고 배수구 마개를 열었을 때, 미세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며 허드렛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가만히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불순물이 많은 물이 배수구멍에 맹렬히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왜곡된 감정들도 흘러가버리길 바랐다. 비워진 세면대에 다시 투명한 물을 받기 위해.     


 한 번은 지인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글을 쓰다가 자꾸만 낯 부끄러워져. 결국에는 싹 다 지워버리거나, 어딘가에 처박아두고 쳐다도 안 보게 돼.” 그러자 지인은 웃으며 말했다. “글이 낯 부끄러운 거 진짜 좋은 글 아닌가? 적어도 거짓말은 아닌 거잖아. 솔직하게 쓴 거잖아.” 그 말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쓴 글, 그 글이야말로 진정한 나를 드러낸 순간일지도 모른다. 부끄럽고 어설픈 글들이 쌓여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글을 통해 조금씩 나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것은 어렵다.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이 이런 잡동사니 글처럼 미완성이고, 어딘가 부족하고, 심지어 나를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쓰기 위한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도 한다. 오늘처럼 ‘잡동사니 파일’ 자체가 글감이 될 수도. 그러고 보면 정말 계륵과도 같은 이 파일들은 절대 버릴 수가 없겠다. 혹시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글감, 그 적은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잡동사니 폴더가 실패의 흔적들이라고 한 말을 번복해야겠다. 실패의 기록이자 창작의 기록이고 내 모든 기록이다. 몇 번이나 다시 열어보고 수정해 보고 재의미화시켜 보는 시간들. 그 안에 쌓인 기록들은 나의 글쓰기 여정의 중요한 일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완벽하지 않아도, 부족해도, 뾰족한 글일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이 잡동사니 폴더 속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가능성을 꺼내 하나씩 다듬어 봐야겠다. 미완성이겠지만, 일단 용기 내어본다.


 아니면, 다시 ‘잡동사니 파일’로. 버리지도 못할 그 글들이 차곡차곡 쌓여 다시 발효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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