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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14. 2024

저마다의 참값

참값을 꿈꾸며,  근삿값을 쓴다

   요즘 에세이는 깊이 없는 흔한 일상 이야기라 싫다고 했다.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 너도 나도 글을 쓴다 했다. 개인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피로감이 든다고 했다. 자기 계발서 역시, 하나같이 맞는 말이라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이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어 싫다고 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 들 뿐이라 했다. 소설은 흐름이 느린 글이라 일상의 속도와 괴리감이 들어 읽기 싫다고 했다. 그럼 무슨 장르의 책을 좋아하는지 되물었다. 빠른 세상의 속도에 맞는 흥미 있는 것들이 넘치게 나오는데 굳이 책이 필요하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되려 질문이 돌아온다. “너 글 쓴다며? 어떤 글 쓰는데?”       


 글을 쓰는 아무개인 나는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대답하며 웃었다.

“네가 안 읽는 글.”        
  

 애초에 '딴짓'이라 말하고 다녔다. 일종의 변명이었으리라. '딴짓'이라는 말이 안전하다는 생각 했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은 문장들처럼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나 작가가 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마침 좋은 플랫폼들을 발견했고,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짧은 단상들을 공개적인 공간에 올렸다. 어설픈 자신감, 어설픈 결과물, 어설픈 희망이 공개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 걸까. 그러다 ‘글에 공감한다’‘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술술 읽힌다’라는 칭찬의 말들이 그 어설픈 근삿값들을 ‘올림’하며 나는 글쓰기라는 본격적인 딴짓을 시작했다. 바로 그 ‘누구나 쓴다’는 말에 홀린 듯, 나도 그 ‘누구나’에 동참하여 쓰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결심했다.      


참값 행세를 하는 근삿값     

‘나는 글쓰기를 독학으로 배웠다’ 은유작가의 저서 『쓰기의 말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다.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말은 어쩌면 저런 말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독학’이라는 말에서 극적인 냄새를 풍겼다. 미숙한 사람이 장인이 되어가는 열정을 함축시킨 말 같아서 더 독하게 느껴졌을까. ‘모든 배움의 원리는 비슷하다’는 은유작가의 말에 나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 가득했던 근삿값들이 하나둘씩 올림 했다. 작가의 장벽이 낮아졌다고 모두들 이야기했다. 누구나 쓴다는 말에 묘한 자격지심이 깔렸다. 스스로를 미숙한 사람이라 두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리라. 모든 게 의심스러운 지금 이 순간들이 나중에 어떻게 남을지, 어떤 식으로 빗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쓰기로 했다. 적당히 해서는 자격지심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딴짓이라는 이름하에 치열한 미친 짓을 해보기로 했다.       


 하루가 너무 짧았다. 일, 육아, 공부, 사람과의 관계.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만 정해진 시간과의 싸움은 나를 가장 지치게 했다.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때로는 이것이 투쟁인 것인지, 일방적으로 맞아터지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잠도 줄이고, 일과 육아의 틈새를 쓰기를 위한 시간으로 메꿔나갔다.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할 일이냐’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거냐’,‘너무 무리하지 마’라고 걱정을 했다. 아직 나의 삶이 서툴러서 그러려니 하며 ‘부족한 나를 이길 수 있다’는 조건부를 앞세워 어제도 오늘도 시간과 싸우며 나의 애씀을 글로 남겼다.


 쓰다 보니 나의 글들은 기념비보다 상흔에 가까웠다. 흉이 될지 나만의 표식이 될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흔하디 흔한 일상일지라도 깊이 없는 몇 문장일지라도 써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었나 보다. 잘 써야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뭐라도 쓰면 된다’는 말에 살며시 반감이 일어났다. 무엇도 아닌 글을 읽을 사람이 있을까. 참값 행세를 하는 근삿값의 크나큰 오차였다. 이제 겨우 시작해 놓고선 말이다.      


 하나의 측정값에는 반드시 오차가 개입하기 때문에 참값이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길이, 무게, 부피 등의 진값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확률적으로 추정한 오차의 값을 아주 미세하게 줄인 근사치에 불과하다. 애초에 어떤 걸 규정할 때 그 기준조차 오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물며 글쓰기에 참값이 어디에 있다고. 같은 글이라도 누군가에겐 형편없을 수도 누군가에게 멋진 글이 될 수 도 있다. 아무리 다듬어도 내가 원하는 참값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완벽한 글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값을 만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한없이 느낀다. 이 문장은 그대로 문단에 올리고, 저 문장은 과감히 버린다. 말하고 싶은것과 말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할때는 반올림을 하는 순간도 많다. 여전히 삐딱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들이라도 퇴고의 순간은 틀린 문장이라 느끼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고친 모든 글은 저 나름대로의 근삿값으로 살아남는 법니다. 모든 근삿값들이 ‘올림’과 ‘버림’과  '반올림'의 계산법으로 각자의 참값을 가진다. 심지어 그 참값들은 시시때때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참값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인생에도 참값은 없다. 매 순간의 근사치로 참값행세를 하며 살다 버릴 건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올려야 할 것들은 한없이 깎아버리니. 어차피 모든 게 근삿값이라면, 저마다의 참값에 다가가기 위해 매 순간을, 근삿값들의 의미를 깨닫고 당당히 사는 게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성장의 속도와 성장의 모양새는 내가 기대한 참값과 다를지라도 딴짓으로라도 오차의 한계를 줄여가며 그 나름의 멋진 근삿값이라도 되어보고 싶다.      


 아무래도 난 정말 타고난 노력파인 게 분명하다.

터널이 자꾸만 길어지는 기분이 든다. '알면 알수록 겸손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는 말도 오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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