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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16. 2024

거짓 딜레마

 가끔은 초능력이 필요해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육아, 일, 자기 계발을 병행하다 보면 글 쓰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빽빽한 일상의 틈에 파고 든 글쓰기는 일탈의 느낌도 든다. 일상과 일탈의 글쓰기는 서로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딜레마에 나를 자주 빠뜨다. 이를테면 이런 마음인 것이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해.’


‘아, 니들이 늦게 자면 글 쓰는 시간이 자꾸만 없어지는데.’


 저녁 9시를 지나면 정말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육아 퇴근 ‘육퇴’를 자꾸만 기다리는 것이다. 아이에게 내어준 시간과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완벽히 분리된 이분법적 사고로 아이에게 시간을 내어주면 내 시간이 없어진다는 착각에 빠진다. 둘 중 하나만 선택 가능한, 다른 선택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유냐 희생이냐 라는 ‘거짓 딜레마’에 곧장 빠진다. 자유와 희생의 흑백논리를 들먹여  어이없게도 ‘포기’라는 단어밖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며칠 전 일이다.

     

 시계를 보니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제는 포기다. 이판사판이다. “엄마는 이제 글을 써야 하니까. 너네는 할거하다가 들어가 자. 알았지?” 12시까지 글을 써야겠다는 약속을 나 자신과 했기에 어떻게든 써내고 싶었다. ‘2시간 몰입하면 분명 뭐라도 써질 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긍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한편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글쓰기 전력을 높이는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늦어진 취침시간, 그 이유 하나면 충분했다. ‘시간에 쫓기면 뭐라도 쓰겠지!’ 이런 자기 확신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으름장을 놓았지만,  자러 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나는 일탈을 감행한다. 식탁에 앉아 미리 써놓은 초고를 불러왔다. 분량이 너무나 짧다. 서너 배는 채워야 할 것 같은 강박의 시계가 또 돌아간다. 글이 길다고 좋은 게 아닌 걸 알지만, 필력을 키우기 위해 한 꼭지당 3000자는 적어보기로 계획했던 나였다. 무조건 채우려다 보니 글은 삼천포로 빠졌고, 지루할 정도로 같은 문장을 반복하기도 했다. 쥐어 짜낸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런데도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단 썼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다. 애들만 좀 자면 더 진도가 나갈 텐데. 오늘따라 육퇴가 너무 늦다.     


 10시 25분. 여전히 잘 생각이 없는 아이들에게 선포했다. “이제 양치하고 방에 들어가서 자자.” 세어보진 않았지만, 열 번은 족히 넘었던 대사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가 신나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첫째 아이는 스케치북을, 둘째 아이는 스티커 퍼즐을 들고 와 내 앞에, 옆에 앉았다. 게임도 이런 게임이 없다. 내가 졌다. ‘11시가 넘어야 들어가겠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1분도 안 되어 본인들의 작품 큐레이션이 시작된다. 이어 공격해 오는 물음표들. 부러 눈을 크게 뜨고 모니터를 더 집중해서 보는 척을 한다. ‘엄마, 집중하는 거 보이지?’ ‘나도 빨리 끝내고 빨리 자고 싶다. 얘들아.’ 속마음을 절대 알지 못하는 눈치 없는 물음표 공격수들은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엄마, 나, 이거 어때? 잘 그린 거 같아?”

“엄마? 형아 잘 그렸다 그치. 엄마 나는 이만큼 붙였어. 잘했지?”

“형아, 134번 못 찾겠어. 찾아주면 안 돼?”

“안돼 형아 이거 집중해서 그려야 해. 엄마한테 물어봐.”

“엄마, 134번 안 보여.”

“엄마 스티커가 찢어졌어. 으앙.”      


‘아, 나에게 시간만 조금 더 주어지면 제대로 쓸 수 있을 텐데.’

이 무슨 오만함인가. 한편으로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착각이 드는 건, 순전히 ‘마감 시간’과 ‘3000자’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육퇴’때문이었으리라. ‘내 능력치가 되지 않아 이렇게나 몸과 마음이 피곤한 것이다’라는 겸손은 흔적도 없이 쏙 들어가고, 환경 탓, 아이들 탓을 하고 있었다. 핑계로 무장한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나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뭐라도 해내는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고, 어떻게든 12시가 되기 전에 글을 쓰고 싶다 발악을 하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11시가 조금 안 되어 두 아이가 자러 들어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이 몰려왔다. 커피믹스 한잔을 타와 홀짝이며 잠을 쫓아냈다. 12시가 넘었고 3000자는 커녕 2000자도 못 적어냈다. 퇴고라서 그런지 품이 더 많이 드는 것 같았다. 고요함도 내려앉았고 본격적인 나만의 시간이 왔는데도 글쓰기 진도는 영 나가지 못했다. 핑계가 허물을 하나씩 벗자, 긍지도 오만함도 같이 따라 벗겨졌다. 헐벗은 겸손이 고요한 시간과 공간에 오롯이 남았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이럴 거였으면 아이들하고 조금 더 이야기나 나눌걸.’     


 일상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도, 시간을 쪼개는 일도, 두 가지 일을 양립하는 일도 대놓고 일탈을 감행하는 일도 말처럼 쉬운 아니다. 특히 육아와 글쓰기를 병행하는 건 정말 양립이 가능한 것인가 여전히 의문이 든다. 육아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집중해야 하고 글쓰기도 흐름을 끊지 않는 몰입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대립이 아닌 공존이라면, 완벽함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타협을 해보기로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아이들에게 기꺼이 내 앞자리와 옆자리를 내어주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한다. 그림도 칭찬해 주며 한번 웃어주고, 134번 스티커도 찾아서 같이 붙여보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완벽한 집중은 어려울 수 있지만, 글도 써지지 않겠지만,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들과의 작고 소중한 글감들은 훗날 더 의미 있는 글로 확장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 어떤 제한된 것들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임을 깨닫는다. 비로소 희생과 포기라는 거짓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10시 안에는 자러 들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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