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내는 행위에 따라오는 것은 낙인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책 『쓰기의 감각』에 나오는 문장이다. 낙인. 어떤 식으로 어떤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는 것에 대한 부연설명이 없는 이 문장을 맹신하지 않았다. 괴물로 낙인이 찍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내가 글을 씀과 동시에 나의 의지와 바람과는 전혀 관계없이 읽는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어떤 형태로 흘러가 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다. 드러내는 행위에 따라오는 것은 책임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내 안의 괴물 혹은 유령
다듬어지지 않은 괴물과 같은 감정을 글로 유려하게 풀겠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모순이다. 비밀스럽고 어둡고 추악한 존재는 아름답게 위장해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독하고 비열한 그 무엇을 어떻게 유려하게 쓸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적어도 현실의 나에게는 말이다.
가공한 인물에 상상의 일들을 덮어씌워 내 안에서만 ‘진짜’가 되게 만드는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를 죽이는 것도 누구를 살리는 것도 소설과 같이 내 상상 안에서만 일어날 일이니까. 다만,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윤리의식 혹은 통념과 대면하여 나를 추악한 사람으로 드러내는 일이 되어버리기에, 최선을 다해 그 괴물 같은 환상이나 유령 같은 환각들이 절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용기 이전에 인간의 도리에 관한 문제였기에.
“차라리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 말이 밖으로 나간 순간 나를 보는 친구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아빤데 네가 이해해야지.” 어떻게 자식이 되어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나머지 말은 눈빛으로 충분히 전해졌다. “농담이다. 아빠가 오늘 좀 미워서 그리 말해봤다. 농담이라니까.” 그 친구와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반사회적 인격에 대한 의미를 친구의 눈빛에서 제대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선량한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내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는 선량한 사람이니.
나는 피해자다. 선택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이라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누가 날 낳아달라고 했나. 억울하다. 의지대로 도망갈 수도 없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 당연하게 모든 걸 수용할 수밖에 없다. 어정쩡한 위치의 나약한 존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가장 안전하고 온화해야 할 환경 속에서 나는 무용한 존재로 던져졌다. 날카로운 비명은 내 심장을 파고들었고 눈앞에 놓인 폭력은 머릿속에 평생 잊지 못할 잔상을 남겼다. 트라우마. 사람들의 불협화음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마음속에 숨겨둔 괴물을 꺼내어 마음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죽이기도 했고, 나도 죽었다. 지독한 괴물. 마음속에 환각을 만들어놓고 유령처럼 사라졌다. 현실에서는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나는 피해자다.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벗어나 생활을 하게 되자, 나는 다른 세상에 나를 던지기 시작했다. ‘던져진 것’과 ‘던진 것’은 분명 다르다.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껏 밖으로 나를 던졌다. 겉으로는 평화주의자를 자처했다. 싸워서 이기고 싶은 생각도 없고 조금 손해 봐도 인생에 크게 타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무장했다. 빈틈없이 지배적으로 만들어진 환상. 빈틈이 없다는 건 죽을힘을 다해 막고 있다는 뜻과 비슷할 것이다. 사실, 사람 사이의 불화가 무서웠을 뿐이다. 불화로 인한 나의 각성이 두려웠을 뿐이다. 불화의 기류가 흐르면 온몸이 반응했다. ‘벗어나자’ 무력감이 엄습하기 전에 빨리 이 자리를 피하자고. 그러지 않으면 내 안의 괴물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들을 이빨로 물어뜯어 죽이고 피가 낭자한 환각을 남겨놓은 채 유령처럼 사라질 테니 내가 먼저 이 자리를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입을 꾹 다물고 숨겨야 했다 빈틈없이.
최선을 다해 벗어나려 외면하려 발악하고 있을 때, 아빠는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감정들이 덮쳤고 세상은 결코 예전의 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영원히 가해자가 되었다.
나는 가해자다.
인격을 여실히 드러낸 것 같아 발가벗은 기분마저 들었다. 어디에도 내어놓을 용기가 없었던 글이었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으로 쓴 글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어떠한 낙인이 찍힐 수도 있겠다 싶어 두렵기도 했다. 이 글이 어떤 식으로 타인에게 흘러갈지 사실은 잘 모르겠다. 누구를 해하는 말도, 나를 찌르는 말도 아닌 글을 쓰기로 다짐했기에 드러내는 행위에 따라오는 것은 책임이라 말을 지킬 수 있는 진짜 선량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는 용기를 내어 내 마음속의 괴물과 정면으로 마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