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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15. 2024

멈추거나 흐르거나

삶의 관성이 깨지는 순간

 23살 겨울, 아빠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흰 천을 들치며 신원 확인을 부탁하던 의사는 무표정한 나의 얼굴을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걷어낸 천 아래로 드러난 아빠의 얼굴이 더 놀란 표정이었다. 아빠의 마지막은 고통의 순간을 캡처해 놓은 듯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벌어진 입 사이로 당장이라도 음성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아빠가 가진 모든 생의 시간은 이미 소멸했다. 나는 생의 끝을 처음 본 날이었다. 무감각하게 생의 유한함을 느꼈다. 지독하게도 무감각했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세계가 불현듯 닫히고, 나는 작은 세계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생의 시계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느리게 흐르던 삶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것 같았다. 삶에도 관성이 작용했을까. 속도가 날수록 자꾸만 나만 뒤로 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갓난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후 내 세상은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다. 세 뼘도 안 되는 조그마한 아이는 금방 젖을 먹어서인지 눈은 감은 채 입을 옴지락거리며 품 안에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코를 맞대고 숨소리와 체온을 느꼈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아이를 안고 있는 건 뱃속에 품은 아홉 달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충만한 감정이었다. 내가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다만, 그 보드랍고 충만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고 육아는 현실임을 체감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언제든 찾아온다. 계산을 두며 잘 살아내고 있다 생각했다. 결괏값에 오차가 생겨도 내 뜻대로 수정할 수 있는 정도의 오차범위라 생각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서 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감정, 오해, 상처. 사실은 예상 가능했던 변수일 수도 있겠다. 육아에 대해 무지했고, 마음만 충만한 자신감은 고작 3kg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아기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부터 삐거덕거리며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건 하루면 족했다. 힘들 때 숨어있는 진짜 본성이 나온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감정적으로 약한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먹고 자고 싸고, 어느 것 하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유약한 존재를 보살펴야 하는 타임 루프 속 반복되는 일상이 나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내 모든 걸 소멸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너의 생을 지켜주겠다며 스스로를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내가 참 우스워 보였다.


 다행히 아이가 나날이 커가면서 내 육아에도 안정기가 찾아왔다. 직접 부딪히고 깨지고, 육아의 바닥부터 배워가며 조금씩 나를 찾았고, 나의 시계도 다시 제 속도로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육아라는 실체를 조금씩 알수록, 나를 똑바로 바라볼수록, 그리고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바닥을 쳤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지함 속에 나를 욱여넣었던 시간을 떠나보내니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행복해하는 남편의 얼굴도 보였다. 그 순간의 충만한 느낌을 남겨 놓고 싶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남겨 놓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진들을 다시 꺼내어 봤다. 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검은색 티셔츠, 무릎이 한껏 튀어나온 트레이닝복, 질끈 묶은 머리카락, 잔디처럼 삐죽삐죽한 앞머리. 남편의 어깨에 올라간 침이 흥건한 턱받이 손수건. 방긋 웃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유치 두 개. 신기하게도 힘들고 지친 순간들은 모두 휘발되고 웃는 얼굴들만 카메라를 응시하며 행복에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행복은 내가 남겨 놓은 삶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에게 찾아오는 게 아닐까. 사진 속의 우리 모습은 행복해 보였고 제법 안전해 보였다. 그리고 4년 뒤 둘째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초보와 경험자는 다른 것인가. 아이들의 성장은 내 삶의 시곗바늘을 한층 빠르게 돌아가게 했다. 시간의 개념이 일그러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 과거는 저 멀리 밀려져 있었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내기에 바빴으며, 내일이라는 개념도 또 다른 오늘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첫째 아이를 안으면서 엄마가 했던 말이 실감이 났다. “나는 내 30대가 인생에서 통으로 사라진 것 같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왜?”라도 되묻지 않아도 엄마가 느꼈던 인생의 속도를 체감하고 있기에.


 내 삶의 시계가 빨라져 생의 끝으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의 분기점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과거의 어린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과 삶을 동행하며 자꾸만 남아 있는 생에 대한 집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래엔 조금 더 근사한 삶을 살고 싶고, 조금 더 안전한 삶, 조금 더 웃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삶의 유한함이 안타까워졌고 불현듯, 아빠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선명하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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