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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oneyberry

아스러진 패피의 꿈

벨트 환상

by 허니베리

저울 위 몸무게를 확인한 순간, 초등학교 시절 자석 실험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쇳가루를 책상에 뿌려놓고 막대자석을 그 근처에 놓자, 순식간에 자석에 들러붙던 쇳가루.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마술처럼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 살도 그렇게 불었다. 막대자석에 쇳가루가 붙어버리듯 어느 순간 내 골격 위에 낯선 살덩이가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한탄이 절로 나왔다.

완전 돼지네.

마침, 곁을 지나가던 남편이 멈춰 서더니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참견했다.

아니, 자긴 돼지 아니야.


이 남자 왜 갑자기 착해졌지? 혹시 어디 아픈가? 남편이 걱정되던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돼지 같지.



남자가 변하는 건 위험한 신호라던데 천만다행히 이 남자는 오늘도 한결같(이 철이 없고 용기는 넘친)다.

하지만 다행인 것과 열받는 것은 별개의 지점이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도끼눈을 한 채 남편 뒤를 쫓자, 남편이 돌아보며 다급히 외쳤다.

나한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자기 말에 공감해 보려고 노력한 거라고!


억울해하는 남편에 대한 응징을 마치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었는데 옷이 줄어있었다. 이것저것 꺼내 입어 보았으나, 다 작았다. 마법의 옷장인가? 살 때만 해도 오버핏이었는데.... 옷장이 부린 마법으로 인해 슬림핏이 되어버린 옷을 끼어 입고 출근했다.


C선생께서 반갑게 인사하며 맞이했다.

“오, 선생님,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딱 들러붙는 옷을 차려입고 오셨네요?”

“이게 사실 넉넉했는데 옷장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이렇게 됐어요. 아무래도 옷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C선생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몸을 굽히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옷장이 문제가 아니라, 요새 섬유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도 계절 바뀔 때 이전에 입던 옷 꺼내 세탁하면 사이즈가 줄더라고요. 옷을 자꾸 사게 하려고 섬유 산업계에 음모가 있는 거 같아요. 음모가.”


마법인지 음모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젊은 총각 선생이 긴 트렌치코트 깃 자락을 펄럭이며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의 옷자락에는 쌀쌀한 가을 공기가 아닌 훈훈한 봄바람이 묻어있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그에게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척하며 교무실 패피인 그의 착장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스캔했다.


먼저 B사 트렌치코트. 누리끼리한 색상이며 펑퍼짐한 모양새로 보아 내가 입으면 걸어 다니는 쌀자루 같을 것이다.

남색 셔츠와 베이지색 치노 팬츠. 저걸 내가 걸친다면 가뜩이나 중성화되고 있는 나는 더더욱 아저씨처럼 보일 것이다.

그때, 그의 허리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저거다!

패피들은 무난하고 평범해 보이는 옷에 포인트를 주어 패션을 살린다고 했어. 게다가 좀 두꺼운 벨트를 차면 배도 좀 눌러줄 수 있을 거야. 세상에 배 안 나온 사람이 어딨어? 단지 눌러주느냐, 자연 그대로 내밀고 다니느냐의 차이 아니겠어?

벨트의 도움으로 배도 누르고 패션도 살려보자.


그때부터 사람들을 볼 때 허리에 찬 벨트만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야 바지 정장을 많이 입으니 그렇다고 치고, 여자들도 이토록 많은 이들이 벨트를 하고 다니는 줄 그도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자리에 앉으면 각양각색 벨트의 향연 속에서 어지러움 마저 느꼈다.

저 중 어떤 게 나한테 어울리려나? 빨간색, 하얀색은 너무 튀고, 무난하게 갈색? 검은색?


때마침 오랜만에 만난 친구 녀석이 허리춤에 주먹만 한 금장 로고가 박힌 벨트를 차고 나왔다. 소싯적 이발비가 없어 장발로 다니던 녀석이었는데 벨트를 보니 와, 성공한 티가 제대로 났다.


마음 같아서는 출세한 친구처럼, 혹은 시합에서 우승한 챔피언처럼 번쩍이는 커다란 금장 벨트를 허리에 턱 하니 두르고 싶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내세울 것 하나 없이 근근이 살아가는 나는 그냥 내 분수에 맞는 제품을 구입하기로 했다.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간신히 보일까 말까 하게 겸손히 로고를 새긴(혹은 숨긴) 벨트 말이다.

정작 벨트 옵션을 고르려 하자, 색깔이나 모양보다도 길이가 고민됐다. 다행히도 이 벨트는 배 나온 미국인 아저씨한테나 맞을 법하게 크게 나왔다는 후기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내 허리에도 한 바퀴 반쯤은 감기겠군.

그나저나, 허리가 어디였더라?


드디어 벨트가 도착했다. 오호, 나도 이제 허리의 위치를 알려주고, 배를 눌러주고, 패피로 만들어줄 다기능 벨트가 생겼다! 콩닥대는 가슴으로 택배 포장을 뜯었다.


박스 안에서 아동용으로 보이는 벨트가 나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리에 둘러보았다. 배에 누가 크레용으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길이도 짧아서 벨트를 잠그면 한 뼘도 채 남지 않았다.


벨트를 구입한 쇼핑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제품 사양과 내가 받은 제품을 비교해 보았다. 후기 속 여자들이 착용하고 있는 사진과 내 허리에 간신히 둘러놓은 벨트의 모습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들의 가냘픈 허리를 묶고 있는 벨트는 예닐곱 살 어린아이가 엄마 벨트를 찬 것처럼 거대하게 보였지만, 내 허리를 간신히 두른 벨트는 엄마가 대여섯 살 딸아이 벨트를 훔쳐 찬 것 처럼 작아 보였다.


조용히 벨트를 풀어서 장롱 깊숙한 곳에 넣으며 생각했다. 아, 이 옷장은 마법의 옷장인데. 다음에 문을 열면 더 줄어들 텐데.


이렇게 나의 벨트에 대한 환상은, 패피에 대한 꿈과 함께 아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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