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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Aug 03. 2023

행복 약국



 잠결에서조차 머리가 맑지 않았다. 몸도 덩달아 가위눌린 듯 무거워져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 사십오 분. 병원에 갈 시기를 몸이 정확하게 알고 있나 보다. 오늘은 약을 처방받으러 병원에 가는 날이다.




 바윗돌 같은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병원으로 향했다. 나를 진료하는 선생은 명의로 소문이 자자하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드는 환자로 인해 진료 예약은 물론이고, 진료 과정도 만만치 않다. 이전에 진료 대기 중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진료 순서를 놓쳐 두 시간 뒤로 밀려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예약 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실 앞에서 총 다섯 시간 넘게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하는 내게, 의사는 자기를 찾아오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점심도 늘 거른다고 간호사가 귀띔했다. 아무튼 오늘도 예약 환자들의 북새통 속에서 기다린 끝에 의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내 뒤로 기다리는 환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내 이야기 들어주고 상태를 살펴봐도 되나 걱정될 정도로 꼼꼼한 진료가 끝난 뒤, 약 처방전을 받아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병원 근처에는 약국이 몇 군데 있는데, 나는 늘 OO 약국이라는 곳에서 약을 짓는다. 약국에 들어가면 아랫니 한 개가 빠진 호호 할아버지 약사가 봄바람에 떠다니는 초록색 나뭇잎 같은 가볍고 밝은 목소리로 "이거 한 잔 드세요. 드시면 힘이 날 거예요. 흠흠"하며 손에 자양 강장제 한 병을 쥐여준다. 중년의 약사가 약을 짓는 동안 할아버지 약사는 기다리는 환자들을 살피며 말을 건넨다.


 “박OO 선생님 찾아오셨지요? 잘하셨어요. 잘하셨어. 박OO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의이지요. 선생님께 진료받고 기분 좋게 생활하면 병이 싹 나을 거예요.” 양쪽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우고 아랫니 한 개가 빠져서 귀여운 치열이 다 드러나도록 벙실벙실 웃음 짓는다. 그 미소를 마주하면 내 마음속 웃음 공장도 가동하기 시작한다.


 “박OO 선생님 환자분들은 땅끝마을에서도 찾아오시는데, 가만 보자. 허니베리 님도 멀리서 오신 거 같은데요?”

 약사의 얼굴에는 유명 아이돌 팬클럽 회장 같은 자부심이 비친다. 이곳에서 처음 약사를 만났을 때는 그의 언행이 다소 과장되게 느껴졌는데, 박 선생에게 진료받으며 나 역시 그녀의 팬이 되고 말았다. 몇 차례의 입원과 진료를 통해 이른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회복을 위해 애쓰는 선생의 모습을 접하며 인술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저는 집이 이 근처예요.”

 “아... 그러시구나. 워낙 다들 멀리서 오셔서...”

 약사의 얼굴에 실망과 민망한 기색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밝은 기운을 되찾고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행복하게 잘 지내십니까?”

 “안녕하세요. 저야 늘 똑같지요. 저기, 잠시 짐 좀 맡기고 어디 좀 다녀올게요.”

 “네. 그러시지요. 기분 좋게 잘 다녀오세요. 좋은 기분으로 다니시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길 거예요.”

 할머니는 익숙한 듯 장본 내용물이 잔뜩 담긴 장바구니를 구석진 곳에 올려놓았고, 약사는 문을 나서는 할머니 등 뒤로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진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OO 제약에서 나온 진통제 있나요? 조제약 외에 추가로 구입하고 싶어서요.”

 “흠흠. 이걸 어쩌나. 우리 약국엔 없는데.”

 잠시 뒤 약사는 내 손에 툭 하고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사탕을 주말이다.

 “이거 OO양행에서 나온 진통제예요. 좋은 회사에서 만든 좋은 약이니 드셔 보세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나에게만 선물(!)을 준 것이 미안했는지 약사는 내 양옆에 앉아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잠시 살펴보더니 마스크와 칫솔을 쓱쓱 챙겨 그분들의 손에도 나눠줬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선물로 인해 약국 안에는 행복 바이러스가 퍼졌다.


 약사는 환자들에게 약을 건네주면서 “걱정은 마시고, 약 잘 챙겨 드시면서 기분 좋게 지내시면 싹 나을 거예요.”를 주문 걸듯 말했고, 듣는 이들은 하나같이 미소로 화답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어디 보자, 허니베리 님 차례로구나. 약 잘 챙겨 드시고 기분 좋게 지내시면...”

 내역을 살펴보던 약사님의 얼굴에 살짝 당황 기색이 비쳤다. 이내 목소리가 진지하게 변했다.

 “젊은 분이... 약 잘 드시면 반드시 좋아지실 거예요. 힘드시더라도 기분 좋게 지내도록 노력하시고요.”

 약사의 말에 밝게 웃으며 답했다.

 “네, 그럼요. 말씀대로 노력할게요. 그리고 약사님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행복하군요. 흠흠. 기분이 아주 최고예요.” 아까 박 선생을 칭찬할 때처럼 양쪽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든다.


 낡은 약국 건물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든은 거뜬히 넘은 것 같은 약사님의 귀여운 미소가 떠올다.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정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려 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오늘 만난 귀인 덕에 침체되어 있던 기분 두둥실 떠올랐다.




이미지 출처: Freepik(작가 mamew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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