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일본 도쿄에 위치한 마리 로랑생 뮤지엄은 프랑스 화가인 마리 로랑생의 작품 약 600여 점을 소유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숨을 거둔 여성 화가의 작품들이 어째서 조국에서는 오랜 시간 잊히고 동양의 먼 나라 일본에 대부분 있는가에 대해 마리 로랑생 뮤지엄 관장 히로히사 요시자와은 설명한다.
“제 부모님께서 1970년대 프랑스를 방문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보고서 감동했습니다. (중략) 제 부모님께서는 로랑생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화가이기 전에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고 조국에서는 잊힌 존재, 마리 로랑생의 진가는 멀리서 온 동양인들에게 발견되어 역으로 유럽에 다시 알려졌다.
몽마르트르의 뮤즈, 입체파 소녀, 기욤의 영원한 연인, 잊힌 여인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마리 로랑생은 본인 스스로도 살아생전 잊혀진 여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 망명과 유랑 생활을 온몸으로 견디고 예술과 색채로 삶을 유지하며 자신의 심정을 시로 남겼다. 그녀의 말처럼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의 예술은 고통을 녹여내어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오묘한 색채와 형언할 수 없는 곡진한 눈빛들로 남았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시 '미라보 다리' 중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1883년 10월 31일, 파리의 호화스러운 저택의 가정부였던 22살의 어머니 멜라니 폴린 로랑생의 딸, 마리 로랑생이 태어났다. 44세 저택의 주인인 아버지는 본래 가정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생아로 태어난 마리와 그녀의 어머니를 위해 작은 아파트를 얻어주고 양육비를 제공했지만 마리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존재를 감춰야 하고 남들에게 수군거림을 당해야 했던 어머니, 가끔 찾아오는 실크 모자를 쓴 아버지. 원치 않는 생명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슬픔과 원망은 남성 존재에 대한 위화감으로 마음 깊이 존재하게 된다.
딸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마리의 아버지는 마리의 교육과 양육비만큼은 아낌없이 지원했다.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공립 명문 여자학교에 입학하여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마리는 반대하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파리 시립 학교에서 데생을 배우기 시작한다.
국립 세브라 자기제작소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고, 욍베르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배우며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게 된다. “쁘띠 로랑생, 당신은 재능이 있어.” 마리의 재능을 알아본 브라크는 마리를 몽마르트르 언덕의 세계 곳곳에서 모인 예술가들의 아틀리에 ‘세탁선’에 초대한다. 1904년 가을부터 마리는 아직 자신이 미술사에 어떤 혁신을 남길지 알지 못하는 젊은 피카소와의 우정을 쌓아간다.
어제 자네의 부인과 만났어
피카소는 마리의 충실한 친구이자 조언가, 오작교 역할까지 해주었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보고 그린 <젊은 여자들>은 초기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마리는 장미색, 푸른색, 녹색, 회색을 기본 색채로 사용하며 빛이 주는 부드러움과 따뜻한 느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분위기에 따라 야수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마리는 점차 입체파와 야수파와는 거리를 두고 슬픔을 간직한 여성을 독특한 색채로 그려내게 된다.
피카소는 자신의 친한 친구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마리에게 소개해 주며 기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제 자네의 부인과 만났어. 자네는 아직 그녀를 모르지만 말이야.”
피카소의 확신대로 두 사람은 만난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마리는 세탁선의 유일한 여성 예술가 동료,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 예술가들의 예술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으며 그녀의 화가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다.
기욤과 피카소의 도움과 후원으로 전시를 열고 화상과 후원자 등 유럽의 다양한 부유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독일의 유명한 화상은 고가에 마리의 작품을 매각한다. 유럽 화단은 새로운 여성 화가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비록 남루했던 태생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격동하는 예술 사조 가운데 당당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립한 화가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화양연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천년의 사랑인 줄만 알았던 기욤 아폴리네르는 집착이 강하고 바람둥이 기질이 강했으며, 결정적으로 1911년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마리의 마음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고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5년 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어머니마저 1913년 세상을 떠나자, 마음 둘 곳 없던 마리는 1년 뒤 갑작스럽게 자신의 후원자였던 독일인 남작 오토 폰 뷔체와 급작스럽게 결혼한다. “무척 똑똑하고, 춤을 잘” 춘다는 이유로 결혼했지만, 화가로 성공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덮어줄 남작 부인이라는 칭호였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깨달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혼여행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미 독일 국적이 되어버린 마리는 파리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남편 오토는 전쟁에 나가길 거부하였기에 두 사람은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망명한다.
가는 곳마다 스파이 혐의를 받으며 검열을 당했기에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고, 성공했던 파리로도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은 엉망이 되었다. 병역기피자가 되어버린 오토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주변에서는 스파이가 아닌지 눈에 불을 켜고 두 사람을 감시했다. 사랑도 삶도 모두 흘러내렸다.
그림만이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1918년 전쟁은 끝나지만 패전한 독일 국민이 프랑스에 입국허가를 받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기에 부부는 독일로 향한다. 여전히 술집을 들락거리던 남편은 싸움이 붙어 권총에 맞아 피범벅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그런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마리는 프랑스 국적을 다시 취득한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잊히지 않았다. 코코 샤넬, 남작 부인 에바 겝하르트 등 파리 사교계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으며 발레단의 의상과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등 40살이 넘은 나이에 다시 성공의 계단을 오른다.
시대는 또다시 전쟁을 향해가고 있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망명길에 오르다 나치의 점령하의 파리로 다시 돌아온다. 살고 있던 아파트도 빼앗기고 독일인이었던 전 남편의 지인과 연루되어 강제수용소에 보내졌으나 혐의가 풀려 8일 만에 석방되기도 하는 등 나치의 감시 아래 궁핍한 생활을 보내면서도 작품 활동은 계속되었다.
어디에서도 전쟁의 그림자는 느낄 수 없는, 이전보다 더한층 화려하고 우아한 소녀들의 세계였다. 전쟁의 비참함이 생애 전반을 괴롭게 했으나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의 그림 속 세계로 들어갔다. 그녀의 삶에서는 오직 그림만이 가치 있는 고통이었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가정부였던 수잔느 모로는 마리의 양녀로 입양된다. 오랜 시간 망명의 길을 함께 했고 누구보다도 마리를 챙기며 곁에 머물러 주었던 어머니 같던 수잔느의 돌봄을 받으며 73세의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눈을 감는다. 마지막까지 그녀가 그린 것은 삶의 비애가 아닌 아름다움과 우아함이었다.
그녀의 유언대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한 손에는 장미를, 한 손에는 아폴리네르의 시집을 들고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미술사에서 ‘죽는 것보다 잊히는 것이 더 비참하다’고 했던 그녀의 이름은 야속하게 잊혔다.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장 콕토라는 미술사의 큰 영향을 미친 거대한 이름 아래로 묻혀졌만, 덧없고 외로운 눈빛을 지닌 아름다움의 여인들은 재조명되었다.
사는 것은 상실의 연속이다. 비록 당시 여성화가로서는 성공의 길을 걸었을지라도 두 번의 전쟁은 마리의 삶과 사는 곳을 빼앗고, 흔들고, 생채기를 냈다. 힘든 시기일수록 그녀의 그림은 화려해졌다. 그저 아름다움만을 고집한다는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아름다움만이 그녀의 인생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가 그린 우아한 소녀들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공허함과 덧없음, 외로움을 동시에 읽어내며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