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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능력으로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폴 고갱

by 김현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요


1919년 서머셋 몸이 발표한 소설 ‘달과 6펜스’는 세상을 진감시켰다.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꾸준히 사랑받는 세계문학 중 하나인 소설의 주인공은 화가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사십 평생을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가정과 일을 그만두고 느닷없이 떠난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어떤 것이 마음의 불을 밝혔는지 이유는 나와있지 않다. 그저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훌쩍 떠나버려 독자 입장에서는 혼란스럽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내를 버렸습니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요.” -달과 6펜스 내용 중-


이기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찰스의 삶은 고갱의 삶과 거의 유사하다. 느닷없고 뜬금없는 비윤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의 묘사는 고갱의 삶을 오히려 자유로운 천재 영혼의 소유자로 신화화시켰다.


미술가가 가진 이상을 상징하는 달, 반대되는 실용적인 사회적 재화 6펜스 그 사이에서 닿을 수 없는 ‘달’을 추구하는 한 인간의 낭만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고갱에게 예술은 단순한 도피와 낭만의 추구 이상이었다. 당장은 대단한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던 것처럼 보이는 현실 도피처럼 보이지만, 현대 미술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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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능력으로 대단한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뭔가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01.jpg 폴 고갱, <자화상>, 1903년, 목판 위의 캔버스에 유채, 42×45cm, 바젤 미술관


언젠가 너는 고립되고 말 것이니, 아무쪼록 네가 하는 일에 정진해라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폴 고갱이 태어났다. 자유주의 신문사 기자인 아버지 클로비스와 페루 부인 어머니 알린 사이에서 태어난 고갱은 1849년부터 1854년까지 생애의 첫 다섯 해를 페루에서 보냈다. 유색인 유모들 손에서 자라며 사탕수수를 빨아먹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섬 생활은 이미 고갱에게는 북받치는 향수나 다름없었다. 훗날 타히티 섬으로 떠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이 아닌, 이국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귀였다.


열일곱 살이 된 고갱은 선원이 되어 남미, 지중해, 얼어붙은 북극해를 탐험했다. 자유롭게 세상을 항해하는 뱃사람, 어머니의 사망 소식은 인도에서 들었다. 어머니는 유언장에서 이렇게 권했다.


“주위 사람들의 거부감이 심해 언젠가 너는 고립되고 말 것이니, 아무쪼록 네가 하는 일에 정진해 주기 바란다.”


세계를 탐험하고 파리로 돌아온 청년에게 어머니의 친구의 도움으로 주식거래의 자리를 맡게 된다. 뱃사람에서 파리 증권거래소로 일하며 젊은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여 네 자녀를 낳는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며 개인 화실 또한 넓어졌다. 어머니의 유언처럼 하는 일에 정진하며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인생을 차근차근 살고 있었지만 언젠가 있을 고립을 향해서도 정진하고 있었다.


02.jpg 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 1889년, 캔버스에 유채, 73.4×91.1cm, 버팔로 미술관


그림에 발목 잡혔다


처음부터 그림만을 그리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안정적인 직업과 넉넉한 수입, 가정, 사회적 지위까지 가진 고갱의 취미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인상주의의 대부 카미유 피사로는 젊은 아마추어 화가의 재능과 열정을 빨리 간파하여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했고 또 하나의 거장 에드가 드가를 소개해 주었다. 드가는 고갱을 안 순간부터 거의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거들먹거리고 불손한 성격을 지닌 고갱이었지만 드가 앞에서만큼은 존경심을 보였다.


1882년, 영원할 줄 알았던 직업이 사라졌다.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로 실직자가 된 고갱은 전업화가로 전향한다. 실패란 없던 인생이었다. 모든 것이 빠르고 즉흥적으로 결정되었고 성공해왔던 고갱은 화가 또한 잘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 겪어보는 생활고에 가정에서는 가장의 지위가 떨어졌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어떻게든 화가로써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매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 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돌이킬 수 없다. 이제 그림밖에는 그의 인생에 남은 것은 없었다. 자존감은 떨어졌지만 자존심만은 남았다. 내 남은 인생은 그림으로 승부를 보리라, 그렇게 고갱은 그림에 발목 잡혔다.


03.jpg 폴 고갱, <천사와 싸우는 야곱>,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2.2×91cm,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


예술에 관한 한 나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옳다


1886년부터 고갱은 생활비를 아끼고 작품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적한 시골로 은둔하고 싶다는 희망에 따라 브르타뉴에 거주한다. 가족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있었지만, 직장과 가정의 속박을 벗어나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나날이 진척되어 가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이오. 모든 화가가 나를 어려워하면서 좋아해, 아무도 내 신념에 찬물을 끼얹지 못한다오.”


기독교의 배후에 이교도 정신이 숨어 있는 원시 세계로 불리는 브르타뉴는 켈트족의 종교적 전통이 보존되어 있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고갱은 더 이상 인상파 화가가 아닌 브르타뉴의 풍광과 주민들의 개성을 담은 그림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평면적인 색면과 상징적인 색채, 추상적으로 보이는 원시적이고 단순화된 형태까지 상징주의로 나아갔다. 고갱은 1888년 동료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지향점과 확신에 찬 신념에 대해 고백했다.


“상징주의는 내 본성의 핵을 이루고 있네. 내가 덜 이해받게 되리라는 사실은 나는 너무나 잘 알아. 자네도 알다시피 예술에 관한 한 나는 언제나 근본적으로 옳다네!”


가족은 여전히 떨어져 살았고 몹시 그리웠다. 그렇지만 자신의 화풍에 대한 영적 가치와 원시적 순수성을 적립한 고갱은 자신이 옳다는 사실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다.


04.jpg 폴 고갱,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01×77cm, 개인소장


나를 사로잡으려는 모든 것이 느껴지는 곳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고갱의 도피욕을 더욱 자극했다. 다양한 나라의 원시적인 가면과 열대지방에서 온 민속적인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보자 서양의 산업문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고갱은 순수한 야만의 땅, 프랑스 식민지인 타히티의 ‘나를 사로잡으려는 모든 것이 느껴지는 곳’인 작은 마을로 들어가 열네 살 소녀와 동거하며 작품에 매진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무척 외로웠다. 다시 친구들과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1893년 파리로 돌아왔으나 그나마 후원해 주는 이들은 모두 죽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타히티 작품들은 일부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대부분은 외면했다. 1년 동안 유럽에서 머물면서 깊은 패배감만을 느낄 뿐이었다.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야만 했다. 파리는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골절을 입고, 매독 후유증과 심장병, 음주 문제까지 심각해졌다. 이제 더 악화될 상황도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유언처럼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인생, 고갱은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고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유언으로 그린 그림, 길이가 무려 4.2미터가 넘는 화폭 위에 존재하는 에덴의 낙원을 그리고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실패한다. 결국 악화된 건강과 가난으로 인해 1903년 5월 8일 눈을 감는다.


05.jpg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캔버스에 유채, 375×139cm, 보스턴 미술관


그들은 나에게 모종의 빚을 졌다


고갱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미술 사조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는 서구 문명이 규정한 '아름다움'의 기준 자체를 의문시했다. 원시성과 야만을 찬미하며, 문명화된 유럽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던 그의 시도는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적 전환을 예고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고갱에게서 결정적 영감을 받았다. 마티스는 그의 색채에서,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관심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평면성과 장식성을 강조한 그의 화풍은 현대 추상미술의 중요한 근원이 되었다. 젊은 화가들이 “나에게 모종의 빚을 졌다”라고 말한 고갱의 지적은 옳았다.


오늘날 고갱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이해하기 어렵고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도피욕과 비상적인 행동들. 하지만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도전, 그리고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선구자적 역할은 부정할 수 없다.


달과 6펜스를 쫓던 증권중개인은, 결국 달도 6펜스도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타히티의 푸른 하늘 아래, 그의 불온한 질문은 여전히 울리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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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219_134347748.jpg 오르세 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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