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붓으로 완성한 복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이전부터 많은 화가들의 회화 주제였다. 이스라엘 베툴리아 마을의 아름다운 과부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그의 목을 잘라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영웅 이야기다. 정숙과 겸손을 상징하는 유디트와 무절제, 욕망, 교만 등으로 상징된 홀로페르네스는 고전 회화부터 보는 이들에게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기 위한 주제로 그려졌으나, 유독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결이 다르다.
보통 유디트는 우아하고 깔끔하게 목을 베고 매력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서는 분수처럼 뿜는 피와 이미 반쯤 썰린 목, 결코 놔주지도 봐주지도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가득 담긴 표정과 거칠게 머리채를 꽉 쥐고 있는 손까지, 그림에서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가 느껴진다.
고작 열여덟의 나이에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재판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결백을 증명했지만, 미꾸라지처럼 가해자는 형을 빠져나간다. 재판에서 이겼음에도 남은 건 수치심과 모욕감, 억울함뿐이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캔버스 위 붓으로나마 복수하는 것뿐이었다. 잔인하지만 생생한 복수의 붓질에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가 나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1593년 7월 8일, 토스카나 출신 화가인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맏이로 아르테미시아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르테미시아가 열두 살 때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혼자 아이들을 키웠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회화를 직접 가르쳤고 열네 살부터 아르테미시아는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나이에 비해 재능이 뛰어났는데, 열일곱 살 때 그린 <수산나와 장로들>은 이미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어른의 보호 없이 어린 여성의 몸으로 성장하기에 로마는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호색꾼과 술주정뱅이들이 툭하면 싸우거나 성범죄가 빈번히 일어나는 도시 속 아버지 혼자 딸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엄격하게 동선을 통제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가까운 곳에 가장 어두운 그림자가 지는 법, 아버지의 친구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가 자연스럽고 음침하게 아르테미시아에게 접근했다. 원근법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 아래 아르테미시아 집을 드나들며 아르테미시아에게 추근거렸고 결국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타시가 결혼을 약속하자 결혼을 통해 자신의 손상된 명예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와의 관계를 억지로 지속한다.
“내가 계속했던 이유는 오로지, 그가 나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나와 결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성폭행을 당하거나 부조리한 일을 당해도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성이 전문 직업을 가지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 오라치오는 참지 않았다. 오라치오는 타시를 강간 혐의와 그림 절도 혐의로 고소한다.
내가 남자였다면,
아르테미시아는 법정에서 선서한 후 타시에게 강제로 처녀성을 잃었다고 증언해야 했다. 조산사의 검진을 받아야 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증언을 증명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고문을 견뎌야 했는데, 손가락에 쇠줄을 감아 조이며 거짓말을 하면 손가락이 으스러질 것이라는 위협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타시는 기소 내용을 전면 부인하며 아르테미시아는 이미 문란한 여인이며 많은 남성들, 심지어 아버지와도 성관계를 맺었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의 허황되고 일관성 없는 거짓말과 이전에 감옥에 다녀온 전력, 나쁜 평판 덕에 판사는 타시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다.
반년 넘은 시간의 재판은 아르테미시아의 결백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남는 건 상처와 분노뿐이었다. 세간에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거짓 소문은 이미 퍼지며 주홍 글씨가 새겨졌다.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교황청의 특별 사면으로 형을 면제받은 타시는 여전히 큰소리 치며 거리를 활보했고 심지어는 다른 여성과 당당히 결혼까지 했다. 아르테미시아에게 남은 건 홀로 삭혀야 하는 분노, 수치, 고통이었다.
재판 이후 명예 회복을 목적으로 피렌체의 약제사와 결혼 후, 피렌체에 머무르며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갔지만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은 계속되었다. 남성 화가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와 대접을 원했지만 언제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공정함은 따라다녔다. 성 불평등에 대한 감각은 역설적으로 아르테미시아의 야심을 자극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일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았을 겁니다.”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영혼
피렌체에서 남편과 함께 아르테미시아는 귀족들과 교류하며 후원자와 고객들을 확보했다. 새로운 인맥 덕분에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종손자 카사 부오나로티와 연결되었다. 덕분에 그녀에게는 다양한 기회와 자격이 주어졌다.
1615년 예술인 길드인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에 회원 가입 허가를 요청했고, 1616년 명성 높은 남성 아카데미의 첫 여성 회원이 되었다.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을 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도 인정받으며 메디치 가문 대공비 마리아 마달레나의 여성으로서의 지지와 지원도 받는다. 힘 있고 독립적인 여성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에 대한 인정이었다. 이제 그녀는 가부장제도 앞에 힘없는 여성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인정받고 기성 권위에 도전하는 한 화가로서 자리 잡았다.
명성이 높아질 때쯤 젊은 귀족 프란체스카 마린기와의 불륜 관계를 맺어 이로 인한 비방으로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돌아왔지만, 피렌체에서 쌓은 명성은 로마로도 이어졌다. 아름답고 육감적이며 순종적인 여성이 아닌 강인한 리더로서의 여성인 ‘팜포르트’의 반영은 여성 통치자 메디치 가문과 스페인 공작, 영국 찰스 1세 등 다양한 후원자의 이목을 끌었다. 그림 속 진취적이고 남성과 동등한 주체적인 여성은 본인을 투영한 것이었으며 계층의 경계를 뛰어넘어 여성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칼자루를 스스로 쥔 사람
1650년까지도 아르테미시아는 나폴리에서 편지를 발송하며 지냈으나, 그 뒤로는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페스트로 인해 생애를 마감했을 수도 있고, 사망 시점도 정확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평론가 로베르토 롱기는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를 보고 "두 방울의 물감만으로 폭력에 얼룩진 피와 불꽃의 열기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칼자루를 쥐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많은 페미니즘 운동과 성추행 저항운동 연대의 상징이 되고 있는 아르테미시아의 그림들은 여성들이 받은 차별과 편견, 비합리적인 신념을 대변한다. 여성이라는 성 제한을 둔 시대에서 태어나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칼자루를 쥐고 주체적인 삶을 산 화가. 붓으로 만든 복수극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건 폭력과 저항만이 아닌 어떤 제약이 와도 칼자루를 스스로 쥐고 삶을 개척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거부할 수 있는 것은 거부하겠다는 강인함의 힘이다.
시대적 한계와 개인의 상처를 예술로 재해석한 그녀의 그림은 오늘날 단순히 페미니즘이라는 젠더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칼자루를 움켜쥔 한 인간으로서의 위대한 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