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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Oct 29. 2021

엄마가 집을 비운 동안 (2)

주양육자 노릇을 경험해 본 남편의 소회

내가 한국에 다녀오고 호텔격리하는 2주 동안 남편이 전담해서 애들을 봤다. 그리고 나서 내가 돌아오니 남편이 그 동안 두 가지를 깨달았다며 고백한다.


1. 아이들은 피곤하다. 데리고 뭘 하지 않아도 그냥 아이들이랑 같이 집에만 있어도 피곤해서, 남편은 그 동안 수많은 플레이데잇과 슬립오버로 아이들을 바삐 돌렸다고 한다.


뭘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랑 같이 있으면 피곤한 이유는 끊임없이 머리가 돌아가고 신경이 쓰이고 있어서 그렇다. 하다못해 아이들을 집에 두고 조깅이나 산책을 하러 나갈 때도 혹시나 싶어 전화기를 들고 나가는데, 그러면 집에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걷기나 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2.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 안되겠다. 버럭 하고 야단을 쳐봤자 아이들은 변하지 않고 다음날에도 같은 것이 반복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나면 기분만 나쁠 뿐 아무 소용이 없더라. 당신이 그렇게 엄청나게 아이들에게 참을성을 발휘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며 탄복하는 남편.


이 2번 깨달음이 나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 줄 것 같다. 남편과의 갈등 중에 제일 잦은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엄격하지 않고 너무 참을성이 많다는 것이었어서 그렇다. 남편이 자기 방식대로 무섭게 한다면 2주 안에 아이들을 뜯어고치고 군기를 꽉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 싹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후로 며칠이 지나고 나니 남편이 깨달은 게 하나 더 늘었다.


3. 애들 관련해서는 한 번 알게 된 것을 몰랐던 것으로 되돌릴 수(unlearn) 없다. 한 번 머릿속에 들어와서 신경이 쓰이게 된 것은 다시 속편하게 잊고 살 수가 없다.


아이들 드림렌즈를 매일 내가 세척해 주는데 지난 2주 동안 남편이 대신했었다. 그런데 렌즈스테이션이 남편이 재택근무하는 침실 겸 사무실 안에 있다보니, 나는 아침에 그 방을 나가면 더 이상 렌즈가 눈에 보이지 않아 세척하는 걸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남편은 계속해서 그게 보이니 견딜 수 없어한다.


그래서 남편은 아직 안 씻은 렌즈가 눈에 보이면 나한테 알려주는데 그때마다 내가 ‘이따가 할게’ 하고 미루는 것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본인이 재택근무를 하는 한 애들 렌즈세척은 자기가 하겠다며 떠맡았다. 렌즈세척 같은 작은 일도 한 번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손톱 밑에 가시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법.


그리고 내 여행 전후로 딸의 학교 수학이 좀 처지고 있다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아이들 학교 관련 일은 전부 내가 했지만 아무래도 미국 중학교 수학은 나보다 남편이 들여다보는 게 더 나을 것이기에, 딸의 수학은 남편이 통째로 가져가서 둘이서 알아서 하기로 했다. 아이고, 홀가분해라.


깨달음이라는 건 오래 안 가고 각자의 상황은 또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주양육자의 짓눌리는 부담감을 남편이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짐이 가벼워진 느낌이다. 거기 더해서, 본인은 겨우 2주 동안 맛을 보았을 뿐 제대로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당신은 이런 주양육자 노릇을 십 년이 넘게 해왔다는 것이 놀랍고 고마울 뿐이라는 립서비스까지.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기간을 맞춰 집을 비우길 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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