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가장 좋은 순간
일요일에 <어드벤쳐 코브 Adventure Cove>에 다녀왔다. 여기는 싱가포르판 캐리비언 베이. 우리 아이 둘이랑 이웃집 남매 둘 이렇게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데, 아이들 넷이 다 어느 정도 수영을 하는 데다가 누나끼리 동생끼리 자주 함께 노는 아이들이라서 부담이 적었다. 아이들끼리 알아서 다니게 하고 나는 혼자서 마음껏 워터파크에서 놀아봐야지! 나는 물놀이를 좋아하는데 어른 친구들은 같이 모여 수영장에 놀러가지 않는다. 같이 모여 골프를 다니는 어른들은 많은데 왜 같이 모여 수영하러 다니지는 않는 걸까?
아이들 핑계를 대고 워터파크에 놀러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맘껏 놀지는 못했다. 사람도 꽤 많은 데다가 거리두기 때문에 풀마다 입장 인원을 제한해서 어딜 가더라도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했다. 슬라이드는 원래도 좋아하지 않는 터라 굳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의 의욕은 없었다. 남들 하듯이 신발은 락커에 넣어두고 맨발로 돌아다녔는데 포장된 돌바닥은 왜 이렇게 뜨겁고 딱딱한지.
학교가 쉬는 평일에 왔어야 했어. 아니, 아침에 개장하자마자 왔어야 했어. 돈을 더 내서라도 익스프레스 패스를 샀어야 했나? 이런저런 후회를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싱가포르는 매우 작은 나라라서 언제라도 여기에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싱가포르에는 엄청나게 멋지고 대단한 곳은 없지만, 한 번 오고 나면 다시 찾기 힘들만큼 멀고 어려운 곳도 없다. 계절의 변화가 없으니 내년 이맘때를 기약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기대치를 낮추고 나니 우리 딸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 보였다. 아이들과 내가 다같이 파도풀에 들어갔는데, 더운 날 긴 줄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동안에 딸은 짜증내는 동생들을 다독였다. 줄이 줄어들지 않을 때는 넘실대는 파도풀을 보며 기대감에 신나했고, 줄이 우리 바로 앞에서 끊어졌을 때는 다음번엔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우리가 들어가기 직전에 마른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잠시 수영장이 운영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을 해산시킬 때도 실망하지 않고 휴게구역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서 줄을 섰다. 파도풀을 마치고 나와서는 "엄마, 너무 재미있었어요, 데리고 와주셔서 감사해요!" 라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더러 같이 파도풀에 들어가자고 한 것도, 자기들은 친구랑 놀고 있는데 엄마는 혼자 있으니까 심심할까 봐서 나를 챙긴다고 한 일이었다.
워터파크라고 하면 아이들이 아기 때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스플래쉬 파크에서 물을 튀기던 것과 파도풀의 해변가에 함께 앉아 파도를 맞던 것만 기억나는데, 언제 이렇게들 컸을까? 지난 2년 동안 싱가포르에 살면서 아이들은 수영을 배웠고 자기들끼리 돌아다니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딸은 다음부터는 엄마가 따라오지 않아도 친구들하고 같이 워터파크에 다닐 수 있다고 귀띔한다. 아들은 아직 파크에 입장하고 간식을 사먹고 짐을 챙기는 데 보호자가 필요하지만, 노는 데는 더 이상 엄마가 필요없다. 이렇게 조금씩 티나지 않게 아이들이 내 손에서 벗어난다.
혼자 남은 나는 물고기떼 속에서 스노클링을 하는 레인보우 리프(Rainbow Reef)에 줄을 섰다. 예상 대기 시간이 45분이었다. 전화기도 없이 줄을 섰어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멍하니 앞사람들을 구경하며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이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파크 개장시간이 끝나가는데 혹시 아이들이 눈치없이 어디서 줄만 서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건 아닌지, 제대로 놀지 못하고 파크가 문을 닫아서 섭섭해하는 아이는 없는지 걱정할 필요 없이 말이다. 아이들의 행동과 마음을 내가 다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조용한 자유로움이 찾아오는 걸 느꼈다.
산호초가 깔린 깊은 물은 차갑고 짭짤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열대어들이 내 주위에서 빙빙 돌다가 손을 뻗으면 스르륵 도망갔다. 열대어마저도 알아서 내 손을 피해 주어, 내가 첨벙거리다가 물고기를 다치게 할 일이 없겠구나. 아이들은 알아서 달려나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물고기는 알아서 나를 피해 도망간다. 나는 잠시 나만 챙겨도 돼는구나.
스노클링을 끝내고 선베드로 돌아왔는데 아직 아이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후 5시, 더위가 한풀 꺾여 하늘이 흐릿해졌다. 싱가포르 날씨는 언제나 습해서 바람이 부는 날에도 공기 속에 차가운 바늘이 없다. 밤공기도 너무 부드러워 푹신할 정도다. 부드럽다 못해 푹 감싸는 느낌이 답답해서 나는 저녁에도 바깥 나들이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물에서 나와 맞는 저녁 공기는 가볍고 서늘했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져 조용한 워터파크 선베드에 앉아 야자수를 바라보며 느끼는 이 가벼운 공기가 아마 싱가포르의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닐까.
그때 결심했다. 이제 싱가포르에서 남은 반 년 동안은 매주 일요일에 가족들과 물놀이를 가겠다고. 그 동안에는 남편과 내가 각각 교회 초등부와 중등부 교사를 맡고 있어서 일요일엔 마음이 바빴는데, 내년에는 그 역할도 이미 내려놓기로 했다. 딸은 일요일 오후에 수영레슨이 있는데 시간을 바꿔야겠다. 일요일에는 점심을 든든히 먹은 후 바닷가에, 워터파크에, 카누타러, 웨이크보딩하러 싱가포르의 해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것이다. 해질녘에는 젖은 몸을 서늘하게 말리면서 온가족이 같이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가야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상태가 좋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야외에서 여러 시간을 보냈는데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몸이 가뿐하니 마음은 더할 수 없이 뿌듯해졌다. 이 느낌을 잊지 않고 반복해서 만들어야겠다. 행복한 인생이 다른 곳에 있을까. 좋았던 오늘이 쌓이면 행복한 내일이 따라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