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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Nov 27. 2021

피아노 급수 시험

아이가 피아노에서 거둔 작은 성취

싱가포르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어린이들은 ABRSM이라는 영국의 피아노 급수 제도를 따른다. 그래서 단계마다 시험을 봐서 급수를 인증받아야 피아노 실력을 증명할 수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년에 두 번 정해진 기간에 영국에서 온 시험관들 앞에서 지정곡을 쳐 보였는데 지금은 피아노 치는 모습을 촬영해서 동영상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시험이 이루어진다. 코로나 초기에는 온라인 시험이 오프라인 시험보다 쉬웠는데, 이젠 한 번의 기회밖에 없는 오프라인 시험과 달리 완벽한 비디오를 찍을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할 수 있는 온라인 시험이 매우 어려워졌다고 한다.


초등 4학년인 우리 아들도 이번에 첫 ABRSM 시험을 치렀다.


촬영할 곡은 총 4개였고 여름 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곡을 배우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는 곡을 외우고, 그러면서 표현을 풍부하게 하고 속도를 빠르게 하고 손가락을 정확하게 하는 모든 디테일을 완성하면서 가을을 보냈다. 우리가 12월 초 한국에 갈 예정이라 그 이전에 비디오를 제출해야 했다.


이 정도면 꽤 잘 하는 것 같은데.. 라고 여겨질 때쯤 더 높은 기준에 맞춰 연주를 다듬어야 했고, 또 다시 이 정도면 꽤 나아진 것 같은데.. 라고 여겨질 무렵 선생님은 더 높은 수준을 요구했다. 9월에서 10월에 이르는 동안 아이는 슬럼프에 빠진 듯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는데, 10월의 어느 날 갑자기 연주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는 또 다시 큰 발전 없이 비슷한 정도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각각의 곡은 한 페이지였고 연달아 쳐도 3분 남짓 길이였다. 아이는 굉장히 지겨워했고 하루에 2-30분 이상 연습을 시키기 어려웠다. 그래도 최소 10분이라도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반복했다. 그렇게 11월의 첫 주말에 레코딩을 시작했다.


네 곡을 연주하면 보통 한 곡은 아주 잘하고, 두 곡은 평범하고, 한 곡은 약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레코딩을 할 때는 이게 아쉬워서 다시 치면 이번에는 저기가 틀리고, 그래서 그 부분을 신경써서 또 치면 다음에는 또 다른 곳이 틀리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아이가 지치고 집중력이 흐트러져 뭘 해도 이전만 못하게 된다.


연습할 때와 마찬가지로 레코딩 단계에서도,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어차피 아이의 현재 실력과 멘탈로는 이 이상 잘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콕 찝어 반복하고 연습하다 보니 결과물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첫날 한 시간 반의 레코딩을 했을 때 굉장히 뿌듯해하던 아이는 세션이 반복되자 점점 지쳐갔다. 이걸 무한정 반복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질 무렵, 5번째 세션에서 여태까지의 베스트라고 여겨지는 멋진 비디오를 하나 건지게 되었다.


8개월 동안 매달려 완성한 연주였다. 나야 그동안 피아노 좀 쳐라 잔소리하며 구경만 했고 스트레스는 아이 본인이 받았는데, 이렇게 시간과 스트레스를 견디니 무언가 특별하게 아름다운 것이 나온 것이다. 아이는 알고 있을까? 본인이 스스로의 실력과 멘탈을 한 단계 뛰어넘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아이가 즐겁게 기꺼이 한 건 아니었다. 여태까지 만난 두 명의 피아노 선생님이 모두 이 아이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다고 했는데, 막상 본인은 피아노 치는 것을 즐기지 않으니 소용없었다. 아이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뭘 하든지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라, 옆에서 바라보기 안스러워서 엄마가 억지로 시킬 수도 없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계속 하는 맷집이 있기도 하니, 도대체 언제 이 아이를 푸시해야 하고 언제 부담을 거둬 줘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 연주 비디오를 촬영하면서는 참 대견하고 기뻤다. 지난 4월에 <실패만 거듭한 악기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도대체 아이들 피아노는 왜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회의하는 글을 썼다. https://brunch.co.kr/@honeylemonspoon/26 그래도 한 번 쯤은 우리 집에서도 이런 기적같은 일이 생겨나는구나. 아이가 신기하고 기특하고 고마웠다.


안타깝게도 시험 동영상을 완성한 다음날부터 아이는 피아노에 다시 흥미를 잃고 연습을 그만뒀다. 선생님이 발견한 그 어떤 재능도, 꾸준한 반복으로 완성작을 만들어 낸 그 어떤 성취의 경험도, 하기 싫은 아이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이 경험에 힘입어 조금 더 큰 꿈을 꾸고 앞으로 나갈 동력을 얻은 사람은 과연 엄마 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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