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is a lot duller than I thought."
12월 5일에 한국에 왔다. 일찍 오는 바람에 올해는 한 해를 한 달이나 서둘러 마감했다. 아직 백신을 맞지 못한 아들이 열흘간 자가격리를 해야 해서 아들만 데리고 다른 가족들보다 한국에 2주 먼저 들어왔다. 그동안 그리웠던 쨍한 한국의 겨울 날씨!! 격리하는 아들을 부모님께 맡겨 두고 조금은 자유롭게 혼자서 다녀야지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모든 것이 기대같지 않다.
코로나, 코로나, 전부 코로나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 확진자가 하루 7000명을 넘으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엄마, 그것도 맞벌이 엄마들이기 때문에 모두 지쳐 있다.
엄마들은 학교나 학원에 확진자가 나오면 아이들이 자가격리를 해야 하니 약속을 잡아 놓고도 나오지 못하게 된다. 정신없는 와중에 아이만 집에 두고 마음 편히 나올 수도 없고,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잡은 약속,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이 나와의 약속을 쉽게 깨거나 서둘러 밥만 먹고 헤어지려 하는 것 같아서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려 하다가도, 확대해석은 하지 않기로 한다.
평일 낮에 집 근처 코엑스몰에 나가 보면 12월답지 않게 한산하다. 한산한 건 좋은데, 밖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오랫동안 돌아다니면서 뭘 사먹을 수가 없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우리 엄마는 내가 한국에서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안 먹고 밖에서 뭐 사먹고 들어오거나 아이들 데리고 나가서 뭐 사먹이고 들어오는 걸 싫어했는데, 코로나가 더해지니 내가 외출만 해도 영 못마땅해 하신다.
나이드신 어른들이 느끼는 코로나 공포는 우리 세대와는 또 다르다. 코로나에 걸리는 것 뿐 아니라, 병상이 부족한데 코로나에 걸리면 집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코로나가 아니라 어떤 다른 건강 이상이 있어도 제때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을 수 없을 거라는 막막함이 더해져 어른들에게 집 밖은 전쟁터 그 자체로 여겨지는 듯하다.
사회 분위기는 썰렁하고 날씨는 내내 흐리다. 외출하는 나는 춥지 않아 좋았는데 집 안에 갇혀 있는 아들이 보기에는 하얗게 눈이 내린 것도 아니요 아름답게 단풍이 든 것도 아닌, 묵직한 회색 하늘과 갈색으로 풀이 죽은 바깥 풍경이 영 심심했나 보다. 드디어 아들이 한 마디 했다. “Mom, Korea is a lot duller than I thought. (엄마 한국은 생각보다 훨씬 밋밋하네요.)”
많은 시간을 집 안에서 보내다가 서랍 한구석에서 2005년의 프랭클린 플래너를 발견했다. 16년 전에 내가 쓴 월간 플래너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면서 나는 올 겨울 모든 것이 기대같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그 때는 플래너가 빼곡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약속이 있었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었다. 좋은 영화는 상대를 바꿔가며 두 번씩 봤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헤어지기 심심해 같이 밥을 먹고 또 장소를 옮겨서 커피를 마셨다. 영화만으로 부족해서 중간중간 연극과 뮤지컬과 발레와 전시를 보러 다녔다. 그렇게 바쁜 중에도 공부한다고 학원에 다녔고, 회사에서는 포지션이 바뀌었다. 출장에 회식이 종종 있었고, 회사 친구들하고도 간혹 밖에서 만났다. 회사 동기들끼리 ‘오남매’ 모임을 결성해서 야구장에 놀러갔다니,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다.
플래너에 적힌 수많은 이름들 중에 누구인지 더 이상 모르겠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아쉽지도 않다. 그러나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생각하면 조금 슬퍼진다. 제일 먼저 연락이 끊긴 건 남자인 친구들이다. 다음으로는 골드미스였던 여자친구들. 어느 한쪽도 특별히 말실수를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기혼 유자녀 이민자 여성이라는 나의 벽에 부딪혀 공통의 관심사를 영영 되찾지 못했다. 아직까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건 엄마인 친구들 뿐이다. 코로나 전에는 오랫만에 누군가 외국에서 왔다는 핑계로 여러 친구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었는데, 이젠 그나마 나 한 사람을 보겠다는 이유로 달려나와 주는 고마운 친구들만 남았다.
그리고 그 때는, 수많은 감정이 있었다. 원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좌절했고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며 스스로가 작아지기도 했다. 앞일을 몰라 두려워하다가도 다시 욕심을 내서 계획을 세웠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를 찾아 쉴새없이 감정을 나누었다. 12월 31일에는 밤 9시가 넘어가자 갑자기 밀려드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친구랑 전화통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내년에 찾아올 ‘기회와 성취와 도전과 실패가 너무 부담스러워 내일이 오지 않기를 아주 잠시 빌어봤지만 그것이 정말 내 마음일 리 없다’는 글을 썼다.
그게 한국에서의 내 마지막 겨울이었다. 나는 이듬해 1월에 만난 사람과 여름 끝자락에 결혼해서 가을이 오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 후 거의 매년 한국에 방문했지만 대부분 여름이었고, 나뭇가지처럼 내게서 자라나 해마다 나이테를 더해가는 아이들과 언제나 함께였다. 16년 만이다. 홀가분하게 아이 한 명만 데리고 겨울의 한국에 돌아온 것은. 다시 혼자가 되어 코트에 롱부츠를 신고 겨울 거리에 나서는 것은.
한국의 겨울이 기대같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마음은 16년 전 겨울로 돌아갔는데 그 시절은 더 이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렇다. 그 때 살던 그 집에 머물면서, 그 때 만났던 그 친구들(중 얼마 남지 않은 몇몇)을 만나며, 나도 모르게 기대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경험하고 싶은 어떤 그리운 것이 있는데 이젠 더 이상 잡히지 않는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라고 했던 옛 시인의 노래를 이제야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