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매달 적당한 금액을 저축하며,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 맛집을 찾아다니고 술을 마셨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근처 국가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밀치고 밀침을 당하며, 회사에서는 왜 이렇게 멍청하냐는 꾸중을 들으며, 하루하루가 큰 일 없이 지나갔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술이 늘었다. 평일에 힘들게 일한 보상심리로 주말에는 동이 틀 때까지 술을 마시고 토를 하고, 다음 날은 숙취로 골골 댔다. 주량이 늘어 매주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됐고 주말마다 필름이 끊겨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을 못 하는 일이 빈번했다. 술 때문에 휴대폰이나 지갑 같은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언론에서는 여자들이 살해당하는 뉴스들이 매일 같이 나왔다. 공중화장실의 벽에 뚫려있는 구멍들에 몰래카메라가 있진 않을까 불안했다. 입만 열면 불만을 토해내고 그렇게 친구들과 회사 욕을 하며 술을 마셨다. 앞으로 몇 년을 그렇게 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생 때 영국에서 자원봉사 비자로 일하며 좋았던 추억이 많았기에 다시 영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다시 영국에 돌아오리라고 간직했던 파운드 지폐, 동전과 오이스터 카드를 다시 챙기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부터 하나하나 준비했다. 영국에 가야겠단 마음을 먹고, 출국까지 6개월 정도가 걸렸다.
한국 언론에서 과로로 사망하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본다. 위키피디아에 과로사(일본어 Karōshi, 過労死)를 찾아보니 일본, 중국,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인 듯하다. 영국 사람들도 야근을 하지만 한국에서처럼 보편적이지 않고, 당연시되지 않으며 너무 늦은 시간까지 하진 않는다. 내가 영국 취업 후에 한동안 야근을 저녁 7,8시까지 하니 영국인 남자 친구는 내가 일을 열심히 한다며 대단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9,10시까지도 야근을 한다고 말해주면 유럽 친구들은 각종 감탄사를 남발하며 놀라워한다. 내게는 놀랄 게 없는 사실이었기에 한국의 늦은 야근이 유럽인들에게 놀랄 수 있는 사실이란 걸 깨닫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다. 한국에서 2018년도부터 실행한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설명하면 이 또한 이들에겐 놀랍다. 참고로 내 남자 친구의 풀타임 계약서는 주 37.5시간 근무 기준이며 영국의 상당 수의 제조업체들은 금요일에 오전 근무만 한다. 작년 여름에 아시아나 항공에 기내식 문제가 생겨 협력업체 사장이 자살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회사 문제로 자살한 한국 사람들이 또 있었다. 영국에 있으면서 누군가 회사와 관련하여 자살했던 뉴스는 들어본 적 없었다. 한국에서 사귀게 된 네덜란드 친구에게 한국에서는 일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니 친구는 한국에서는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개인에게 커서 그런 거 같다고 했다. 하루에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고, 회사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럽에서는 일뿐만 아니라 인생을 즐기고 인생에 중요한 다른 것들이 더많아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불어 유럽의 사회안전망도 일에 대한 어려움이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진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우리나라는 인적자원이 국가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국민들이 국가의 큰 힘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완화돼야 될 필요성도 있고, 나는 열심히 일 하는 사회분위기에서보다 여유 있게 일하는 나라에서 일하고 싶었다. 한국은 인터넷에서 주문 다음 날 받는 배송이 보편적이다. 늦어도 2일, 3일 후에는 보통 배송을 받는다. 영국에는 근 몇 년 사이 미국 업체인 아마존이 프라임 서비스를 실시하여 일부 아이템에 한해서 배송비를 더 지불하면 주문 다음 날 배송을 받을 수 있다. 그 이외에는 주문 후에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굉장히 불편할 것으로 들리지만 막상 적응이 되면 불편하단 생각이 들거나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일단 그렇게 다음 날까지 급히 필요한 물건들이 많이 없으며, 어떤 물건이 언제까지 필요하다 싶으면 배송시간을 고려해 미리 주문을 하면 된다. 당장 필요한 물건들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면 그만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면 어지간한 배송 지연 일로는 불만이 생기지 않는다. 한 번은 여행을 가기 전에 편하게 신을 운동화를 배송 기간 5일을 고려해서 미리 주문을 했는데, 주문하고 6일 후에 배송이 와서 여행 갈 때 결국 새 운동화를 신지 못했다.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구매후기에 날카롭게 불만을 표시했을 텐데도 영국의 잊을 만한 하면 오는 배송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게 되었달까.
2. 갑을문화
나는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라.'는 말을 참 싫어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건데 어떤 이유에선지 이 안 되는 걸 요구하는 사람들을 한국에서 많이 겪었다. 예를 들어, 이런 이런 이유로 안 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는 그래도 해달라고 떼를 쓰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에서는 상대가 갑이든 내가 갑이든 간에 안 된다고 하고 이유를 설명하면 끝이다. 영국은 을의 입장도 갑질을 할 만큼 갑을 문화가 없다. 예를 들면, 영국 부동산이나 법무사(solicitor)는 을임에도 고객이 계속 독촉을 해야 겨우 일을 해줘서 고객이 답답해하고 스트레스받는 일이 비일비재한다. 이런 일이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내가 갑이라고 갑질 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들 릴랙스 한 편이다. 한 번은 회사의 거래처에 그들 입장에선 무리한 부탁을 하니 이번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단번에 거절하였다. 너무 단번에 거절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내가 돈을 지불한단 이유로 상대를 하대할 권리가 생긴다고 믿는 갑을문화가 싫었다. 상대도 나와 같은 가치 있고 중요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나이가 많다 해서, 직급이 높다 해서 아랫사람에게 도를 지나치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인식이 싫었다.
3. 여자로 대상화되기
근 몇 년 전부터 '시선 강간'이란 말이 널리 쓰인다.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나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행위를 말한다. 나는 상대방의 시선에 민감한 편이라 내가 짧은 하의를 입고 있으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남자들의 시선을 자주 느꼈다. 너무 익숙해 적응이 됐을 정도였다. 영국에 와서 며칠 지내고 나서 느낀 사실은 여기는 그런 시선 강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서로를 쳐다본다. 대신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다. 한국에서는 노골적으로 쳐다본다면, 영국은 힐끔힐끔 보는 분위기랄까. 지난여름에 한국에서 친구들과 계곡으로 휴가를 갔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용산역에서 크롭티와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친구가 유리문을 등지고 서있었고 나는 그 유리문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소름 돋을 정도로 중년의 남자들은 모두 내 친구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훑고, 하물며 유리문을 지나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친구의 앞모습도 확인하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은 다른 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내가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쳐다보아도 그들은 나의 시선을 단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여성을 대상화하면서도 자신들이 대상화될 수 있단 생각은 일절 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또한 내 친구들은 그런 시선들을 내가 알아차리는 횟수에 훨씬 못 미치게 느꼈다.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무뎌져야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날은 그 친구와 어디를 가든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몇 달 전에는 남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에 환멸이 났다. 주말에 친구들과 클럽에 가면 나는 남자에게 먼저 가서 말을 걸어서 다가가는 타입이었지, 나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받아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한 번은 클럽 안에서 걸어가는데 남자 셋이 나를 스캔한답시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셋이 동시에 돌렸다. 내가 계속 쳐다보는데도 남자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자 나는 불쾌함에 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한국에서 대상화되는 일상이 지겨웠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직장에서도 외모로 평가당하고, 어딜 가서든 '사람'이기 이전에 '여자'라는 걸 항상 인식당하고 살았다. "밤늦게 다니지 말아라.", "치마 속에는 속바지를 입어라.", "요즘 살쪘니?" 등 여자가 아니었으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항상 들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치마 속에 속바지를 입지 않는다. 내가 영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보게 되는 여자들도 모두 치마 속에 속바지는 입지 않는다. 한국도 이제 여자들에게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말하기보다 남자들에게 '여자에게 나쁜 짓 하지 말아라.', '여자를 성적 대상화하지 말아라.'라고 교육시켜야 되지 않을까.
4. 명품백, 좋은 옷 꼭 필요할까
나는 옷이나 가방에 그렇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오래된 옷과 가방을 들고 다니면 주변에서 그것 좀 버리라고들 했다. 내가 영국에 오자, 구멍 난 양말과 옷을 입고 다니는 나보다 더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작년에 찍은 영국인 남자친구의 양말. 남자친구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단지 무심할 뿐이다.
나는 명품백이 없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반면 영국에서는 명품백을 길거리에서 그렇게 쉽게 볼 수 없다.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가방을 드는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오래된 옷을 입고 싼 옷을 입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나는 한국의 옷 트렌드를 따라갈 만큼 패션에 관심 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결혼식장에 들고 다닐 명품백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나의 옷과 가방에 남들이 신경 덜 쓰는 것 같다. 내가 좀 더 나 자체로 살아가기에 자유로운 생각이 든다.
영국은 건강과 안전 규정이 잘 되어 있다. 운전기사의 경우 하루에 10시간 이상 운전을 못 하게 되어있고, 승객을 태우는 기사의 경우, 휴식시간 규정까지 세세히 정해져 있다. 규정이 규정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사람들은 이를 준수한다. 한국에도 이런 규정이 잘 되어있고 준수가 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살렸을까.
국제노동기구 통계 페이지(www.ilo.org)에서 산업 재해(occupational injuries) 항목을 보면 2015년 기준, 노동자 100,000 당 심각한 산업 부상( Fatal occupational injuries per 100'000 workers)을 입은 수치가 한국은 5.3, 영국은 0.8이다. 한국에서는 산업재해로 죽는 사람들이 돈이 많고 배운 상류층이 아니라, 서민층, 비정규직 같이 사회적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내가 지금 당장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일하다 사고를 당한다고 생각하면 언젠가 나와 내 주변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사고는 피할 수 없고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지만, 국가와 고용주들이 또 모두가 노력하면 사고를 상당수는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복되는 사고에도 억울한 산업재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참사는 1999년 씨랜드 참사다. 당시 많은 어린아이들이 사고를 당해 가슴이 아프고 슬펐던 기억이 있다. 어린 학생들이 단체 여행을 가서 발생한 참사에는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2016년에는 세월호 참사까지, 나는 그 20년간 국가가 정부가 어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내가 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꼭 살아야겠단 생각도 흐려져갔다.
완벽한 나라는 없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을 다른 나라보다 선호한다. 뭐든지 빠르고, 음식이 맛있고, 기술이 발달돼있다. 기반시설이 잘 돼있고, 청결하다. 영국은 지하철과 버스에 에어컨이 없고, 엘리베이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지하철 역이 손에 꼽는다. 음식이 맛이 없고, 집값과 교통비가 비싸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나라가 있다. 나에겐 영국의 삶이 더 맞았고 그래서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공짜인 부모님 집을 떠나 한 달에 백만 원씩 집세를 지불하며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다. 향수병은 언제나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 부조리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사람 간의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