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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순이 Apr 26. 2022

D에게

D에게.

D야, 잘 지내니? 상투적인 인사지만 궁금해.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얼마 전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봤어. 기억나? 우리 둘 다 좋아했던 영화잖아. 나는 미셸 공드리를, 너는 케이트 윈슬렛을 좋아했었지. 경쟁하듯 영화를 추천하고, 함께 찾아봤던 일들이 기억났어. 재미없는 영화도 꾸역꾸역 봤잖아. 이런 게 예술이라면 견디자면서.


그날, 네이버에 네 이름을 검색해 봤어. 왜 그랬을까? 연락이 하고 싶었던 거라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찾아봤을 텐데...

검색 결과에 놀랐어. 네가 '영화감독'이라고 나오더라고. 동명이인인지 의심할 필요는 없었어. 작게 붙어 나온 사진이 영락없는 너였거든.

너는 단편 영화 한 편을 전주 국제 영화제에 출품했더라. 볼 수 있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없었어. 아쉬웠어. 네가 어떤 이야기를, 영화를 만들었는지 궁금했거든.


D야. 기억나? 너는 감독이, 나는 작가가 돼서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했었잖아. 생업 때문에 당장은 힘들더라도, 나중에 꼭 함께 만들자고. 그런데 그 사이 네가 정말 영화감독이 되어있었다니... 가슴이 벅차올랐어.

......사실,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었어. 뿌듯했는데 슬프고, 질투가 나더라. 열등감과 자괴감이 몰아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치졸한 나 자신에 더 화가 났지.

네가 꿈을 향했던 그 시간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대학은 빠르게 포기했고, 서울로 올라왔지. 일을 해서 돈을 버니 좋더라고. ‘소비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좋았어. 집에서, 가난에서 벗어난 거 같았거든.

그 삶에 젖어 꿈을 까맣게 잊었고, 잃어버렸어.


꿈이 삐죽 세어 나온 때가 있었어. 회사를 때려치우고, 글을 쓰겠노라 다짐했지. 하지만 단 한 자도 못 썼어. 습작을 하고, 공모전에 출품을 하고, 하다못해 블로그에라도 글을 썼어야 하잖아. 그런데 쓰지 않았어. 그냥...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모아뒀던 돈이 떨어질 때쯤 다시 조용히 취업했어.

모두가 현실 뒤에 숨어서 산다고 생각했어. 요즘 같은 세상에 '꿈'이라는 단어는 거창하잖아. 재능이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지.

그런데 네 덕분에 새삼스럽게 깨달았어. 다 핑계였다는 걸... 우리 비슷했잖아. 재능은 평범했고, 꿈보단 가난에서 먼저 벗어나고 싶어 했지.

누구의 성공보다도, 나와 닮았던 네가 이룬 것에 자괴감을 느꼈어... 나 참 옹졸하지?


그때 이후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 질투로 시작했다는 게 부끄럽지만, 너에게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온전히 축하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잊고 있었던 꿈을 기억나게 해줘서 고맙다고.


D야. 영화는 계속 하고 있니? 지금도 가끔 네 이름을 검색해. 필모그래피가 더 쌓이길 바라면서 말이야.

혹시 잊었다면, 네가 나에게 그랬듯 나도 너에게 기억나게 해주고 싶어. 밤새 우리가 꿈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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