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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순이 Oct 26. 2022

고구마를 먹다가

 '잘 씻은 고구마를 넣고 고구마가 거의 잠길 정도로 물을 부어서 센 불에 뚜껑을 다고 끓이다가...'

함께 동봉된 설명서를 눈으로 훑으며 고구마를 삶기 시작했다. 다이어트를 결심했을 때를 제외하고 고구마를, 그것도 '유기농 햇 고구마'를 비싼 값을 주고 사 보기는 처음이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갑자기 고구마가 당겼다. 역시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눈치채는 건 혀일까?

설명서대로 삶은 고구마는 보기에도 포슬포슬한 밤고구마였다. 호박고구마를 싫어하는 내게 안성맞춤. 끝 부분을 휴지로 돌돌 말아 잡고 껍질을 살살 벗겨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호호 불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이었다. 코 끝이 찡했다.


 나는 할머니의 솥과 과일 소쿠리에서 계절을 배웠다. 봄에는 딸기와 쑥떡이, 여름에는 옥수수와 수박이, 가을에는 밤과 사과가, 겨울에는 고구마와 귤이 빠지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농사를 지으시거나 마을의 누군가가 지은 농작물이 늘 계절과 함께 찾아왔다. 할머니가 참외를 깎아서, 밤을 삶아서 먹으라고 내미는 게 싫고 귀찮았다. 아이스크림도 과자도 아닌 감이라니... 석류라니! 그 계절에 맞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고 고마움인지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어느 날 크게 넘어져 병원을 가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쪽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 갔더니 뇌졸중이라고 했다가 암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검사에 검사를 거듭했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병명은 엄마가 끝내 내게 정확히 전달해주지 못할 정도로 희귀하고 알 수 없는 병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입원하신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새벽에 차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어안이 벙벙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그게 더 슬펐다. 만약 내가 할머니를 자주 만나고, 자주 전화를 드리고, 더 교류가 잦았더라면......








  결국 고구마를 먹다 목이 막혀 급히 생수통을 꺼내들었다. 눈치없이 할머니의 부재를 알아챈 혀가 원망스러웠다. 냉장고 한 구석에 할머니의 마지막 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참았던 눈물을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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