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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순이 Oct 06. 2020

기억의 저 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내게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 기억이 하나 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서커스 공연이 왔다. 일곱 살 즈음이었던 거 같고 아직 아빠 사업이 망하기 전,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이혼할 거란 걸 꿈에도 모르던 시절이다.

 온 가족이 손을 잡고 보러 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호프집 같은 곳에 들렀다. 치킨을 먹었고, 아빠는 맥주를 한 잔 마셨던 거 같다. 이전까지 가본 적이 없는 분위기의 어두운 식당이라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빠에게 엄마와 우리 중 누굴 더 사랑하느냐 물었고 아빠는 당연히 엄마라고 했다. 그 누구와도 엄마는 바꿀 수 없다며. 아빠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까지도 생생하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이다. 

 이 기억이 조작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처음 들었던 건, 도무지 서커스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다. 천막이 쳐 있었고, 불에 휩싸인 링을 봤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서커스를 보고 걸어왔던 길은 떠오르지만, 무얼 봤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부모님 두 분 다 우리를 데리고 서커스를 보러 간 기억이 없다고 했다. 서커스라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니, 보러 갔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고. 역시 내 기억이 잘못됐나 싶어 여동생에게 물어봤는데, 여동생은 또 기억이 난다고 했다. 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아버님 너무 좋으신데?"

 아빠를 처음 소개해준 날, 남자 친구는 말했다. 말만 들었을 땐 아빠가 엄청 무섭고 불편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다정하고 온화하셔서 놀랐다며.

 "원래 남들 앞에선 그래."

 나는 시니컬하게 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를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젠틀하고 다정한 척하는 사람. 깊이 알고 가까워질수록 상처를 주는 사람. 솔직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상처를 주는 사람. 

 아빠도 나도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때였다. 이미 지쳐있는 나를 들쑤시는 아빠가 싫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아빠와 다퉜던 일부터 10년이 더 지난 일들까지. 아빠가 내게 했던 상처를 주는 말들이 휘몰아쳤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그 충격으로 말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피아니스트 폴. 그를 너무 사랑하지만 강박적으로 구는 이모 두 명과 살아간다. 그의 이모들은 부모가 죽은 원인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데, 폴은 그저 아빠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부모의 죽음은 그에게 큰 트라우마와 아빠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담 프루스트가 주는 기묘한 차를 마시고, 기억의 조각들을 찾는 폴. 마담 프루스트는 '기억은 물고기처럼 물속 깊숙이 숨어있다'라고 하며 기억들이 좋아할 만한 미끼를 던져, 기억을 건져 올릴 수 있다고 한다. 폴은... 기억의 저 쪽 편에서, 지금껏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전혀 다른 기억을 찾게 된다.








 아빠가 엄마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식들에게만큼은 다정하고 헌신적인 아빠였다. 곁에 있지 못 한 시간이 길었지만, 우릴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상처를 주는 말보다, 사랑과 응원의 말을 더 많이 해줬다. 아빠가 부재였던 시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물론 눈에 보이는 행동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기억이라는 건 정말 불확실하다. 서커스를 보고 잊을 수도 있고, 보지 않고도 봤다고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짜깁기도 한다. 서커스를 봤는지 안 봤는지가 헷갈리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사람에 대해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왜곡된 기억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다. 좋은 일만 기억하기 위해 애쓸 이유도 없지만, 나쁜 기억을 부풀릴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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