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해버리기 때문일까. 당시엔 정신없이 지나가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 공간과 시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지나고 나서야 나는 다시 한번 과거의 장면과 순간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면서 상기하곤 하는데,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주변의 풍경이랄까, 냄새랄까, 혹은 무심코 지나쳐버린 누군가의 표정이나 태도와 같은 것들을 그제야 곰곰 떠올려 보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낮에 겪은 얼떨떨했던 일들을 다시금 찬찬히,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서 기억의 틈을 부분 부분 메꾸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정리가 잘 안 되는, 모호한 꿈같이 느껴졌다. 참 신선한 날이었지, 재밌었어. 피식피식 자꾸 엷은 웃음이 새 나왔다.
창밖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건 그때였다. 모르는 사이에 벌써 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느라 베란다 블라인드를 내릴 시간이 된 것도 깜빡 잊고 있었다. 저층 아파트답게 창밖으로 바로 보이는 나무의 변화를 통해 그 시기 계절을 흠뻑 느낄 수 있는 건 아주 큰 장점이었지만, 해가 떨어지는 저녁 시간이 되면 잊지 않고 블라인드를 꼭 내려야만 했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위험이 있었다.
다급히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데 때마침 벨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M과 S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한 날이었다. 간만에 회포를 풀자고, 과연 삼사십 대 보통의 여성들답게 그들은 매번 ‘다이어트’를 외치면서도 양심상 술만 준비해오지 않았을 뿐 양손에 샐러드며, 소금 빵이며 주전부리를 잊지 않았다.
사용한 식기를 퇴식구에 가져다 두는 만큼이나 독신녀의 집을 미혼녀들의 아지트로 삼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순리일 터. 이미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 경력자들답게 그들은 벌써 접시와 포크 등의 용구를 챙겨 주전부리들을 거실에 놓인 테이블 위에 먹기 좋게 펼쳐 놓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본격적으로 먹을 준비를 다 해놓았는데, 정작 나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야, 핸드폰 그만하고, 물티슈 어딨어.”
맏언니 M이 보다 못해 내게 집주인으로서의 본분을 일깨워주는 한 마디를 꺼냈다.
“아.”
혹시라도 그들이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얼른 몸을 일으키며 물티슈와 함께 내 뒤에 있던, 이미 여러 번 만져 구김이 간 종이를 들이밀었다.
‘견인 안내문’이었다.
“언니, 언니, 나 오늘 차 견인됐었잖아. 대박이지.”
어머, 하며 놀란 표정을 짓는 그들 앞에서 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너무나도 개인적인, 하지만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