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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Aug 20. 2022

상여자 특) 프로포즈 먼저 함 #1

조금 도톰한 트렌치코트를 챙겨 입었음에도, 시월과 다르게 십일월은 역시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웠다. 꽤 쌀쌀한 날씨였다. 초저녁부터 ‘아는 사람’과 ‘썸남’의 경계에 걸친 한 남자와 소주 한잔을 한 뒤였다. 지하철 입구 앞에서 그가 나보다 먼저 떠날 수 있게끔 그의 등을 밀어 보냈다. 완전한 ‘썸’도 아닌데 굳이 가는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심정이었다. 이 나이쯤 되면 이런 담담한 감정선을 이해해야 하는 걸까. 벌써 너덧 번을 내리 만났는데도 만남이 끝나면 번번이 즐거웠던 감정에서 훌쩍 빠져나와 금세 차분해지곤 했다. 이십 대, 삼십 대 초반까지의 하이텐션 유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서로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니 연달아 만났겠지, 싶으면서도 명확하게 ‘좋다, 좋아한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스파크가 이는 강렬한 만남은 왜 젊은 날에 집중되어 있을까, 불공평해. 괜히 가슴이 시렸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에 진동이 느껴졌다.      


- 재밌었어 들어가서 연락해~      


진실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불쑥 들었다. 어쩌면 이 복잡한 기분은 단순히 내게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몰랐다. 만일 나에 대한 그의 호감을 정확히 볼 수 있었더라면 달랐을 수도 있을 문제였다. 어떤 감정은 타인의 감정을 확인하는 그 순간부터 피어나기도 하니까.      


<유미의 세포들>처럼 내 안에도 나를 주인으로 섬기며 열심히 일하는 세포들이 있다면, 지금은 ‘연륜 세포’가 활약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진실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재밌었다, 연락하라’는 그 건조한 문장을 다시 읽어볼수록 어째 삭막함이 느껴지더니만, 수많은 경험을 통해 통찰력을 획득했을 ‘연륜 세포’는 이제 내게 가능성 없이 저물어가는 이 관계를 담담히 인정하라 설득하고 있었다.      


어라.     


카톡창을 닫자마자 눈에 띈 바탕화면의 인스타그램 아이콘 위 빨간 1은 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다이렉트 메시지다. 점심시간 즈음 올렸던 수영복 구매를 고민하는 스토리에 대한 답장이었다.      


그다지 끈기가 없는 내가 무려 사 년이 훌쩍 넘게 꾸준히 해온 유일한 운동이 바로 수영이었다. 본격적으로 수영을 배우기 전, 인터넷 어딘가에서 수영장의 고수와 하수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수영복의 화려함에 주목하라는 사실인지 우스갯소리인지 모를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정보에 따르자면 보통 검은색의 심플한 수영복을 착용하는 사람은 초급반이고, 디자인과 무늬가 화려한 수영복을 착용했다면 상급반 이상의 수강생일 것이라는 얘기였다. 우습게도 나는 강습 첫날에 고수와 하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고, 그 말은 신빙성 있는 아주 명확한 사실로 판명되었다. 어떤 규칙도 없고, 아무도 그런 제재를 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함의 정도는 태권도의 흰 띠와 검은 띠의 차이만큼이나 숙련도를 나타내는 상징 그 자체였다.      


나 역시 중급반으로의 승급을 명받자마자 숙련도가 향상되었음을, 화려한 수영복을 입을 자격이 있음을 자신하고 새로운 수영복을 찾기 시작했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레나, 엘르 따위의 브랜드만 알고 있던 내가 펑키타, 르망고, 졸린과 같은 브랜드를 접하게 된 것이 그때였다. 홀린 듯이 하나, 둘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 사 년이 지난 시점에는 벌써 스무 벌이 훌쩍 넘어버렸으니 수영과 함께 수영복을 수집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취미가 된 상황이었다. 종종 나는 그날의 수영복 코디라든지 구매가 고민되는 수영복을 인스타에 공유하곤 했는데, 몇 주 전부터 광고로 여러 번 보이던 새로운 브랜드의 수영복 구매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 예쁘네요 저거 소재는 안 늘어나는 건가요?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그리고 딱히 편견을 갖지 않는 성격 덕에 내겐 소셜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 한 번 보지 않았어도 자주 소통하는 사람들이면 나는 그들을 기꺼이 ‘친구’로 치곤 했다. 공통된 관심사를 가졌기 때문일까. 종종 그 사람들은 현실 친구들보다도 내게 더욱 위로와 의지가 되기도 했고, 그리하여 십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오랜 인연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서로 팔로우만 되어 있어 ‘인친’ 관계에 불과할 뿐, 한 번도 ‘소통’을 해 본 기억이 없는, ID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지, 이 사람도 참. 이미 구매한 것도 아니고 나도 살지 말지 고민해서 올렸다는 걸 모르나? 내가 소재를 어떻게 알겠냐고.      


- 잘 모르겠네요     


어물쩍 넘기기 위해 대충 보낸 답에 얼마쯤 지나지 않아 다시 답장이 왔다.

     

- 홈페이지 들어와서 봤는데 리사이클 소재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수영복 늘어나면 안 예뻐서. 근데 남자 건 없네요.     


소셜에 ‘진심인’ 여자치고 이런 사례 한 번 겪지 않은 사람들 있으면 나와보시라. ‘일부’ 남자들은 이렇게 괜히 엉큼하게 쓸데없이 말을 걸고 대화를 이어가면서 친분을 쌓으려고 수작을 건다. 내 관심사에 실은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관심 있는 척. 저 한 문장만 봐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걸 이 사람은 알까.

     

- 아 네.. 수영 좋아하세요?     


- 저 수영 관련 일 하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과 행동이 나의 미래가 된다는 신념에 따라, 나는 운명이란 말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종종 어떤 사건은 나의 선택의 결과가 아닌, 고차원의 어떤 존재의 완벽한 계획하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몇 번쯤 그때를 다시 떠올려 보곤 했다. 별것 아닌 그 사사로운 대화를. 생각해 보곤 했다. 그때 다시 한번 답장 버튼을 누른 건, 과연 내 자유의지였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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