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를 요구할 게 아니라 상대방 언어가 나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기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엄마에 대한 내 불만, 최근에 알게 된 나에 대한 올케의 불만으로 홍역을 겪으면서 나는 각자의 사랑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유하자면, 나는 딸기가 맛있고 좋아서 내 애정과 관심을 딸기를 주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상대방이 확인하는 자신에 대한 사랑은 딸기가 아닌 참외를 주는 행위다. 내 사랑은 딸기인데, 상대방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고 불만스러워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미국 작가 게리 채프먼은 이를 '사랑의 언어'로 명명하면서 그 차이를 언어에 비유했다. 진심을 다해 사랑을 말하지만,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상대방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테스트를 제시하고, 사랑의 언어 종류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인정하는 말을 할 때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가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할애할 때, 누군가는 선물을 받을 때, 또는 상대방이 자기를 도와줄 때, 또 누군가는 스킨십을 사랑이라고 여긴다고 안내한다.
나는 선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인정하는 말과 함께하는 시간, 스킨십이다. 상대방을 배우자로 전제하고 하는 테스트이지만, 엄마의 사랑 언어도 유추된다. 엄마는 아마도 자기를 도와주고 선물로 표현 받을 때 사랑이라고 느끼리라 추측한다. 나는 엄마에게 나를 믿고 격려하며 지지하는 말을 듣고 싶어했지만, 엄마는 언제나 내게 실질적 도움을 주려했고, 그것이 엄마에 대한 내 가장 큰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엄마가 내 사랑의 언어를 알게 되면, 엄마는 자기 사랑 표현 방식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내가 원하는 걸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러나 엄마는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내 요구를 애초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움되지 않는 격려의 말이나 믿음의 태도 따위는 엄마가 느끼기에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건 아니겠지만, 자신이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걸 굳이 거부한다는 게 너무도 의아했던 것이다. 엄마는 참외보다 딸기가 훨씬 맛있다고 여겼고, 무엇보다 엄마가 갖고 있는, 그래서 줄 수 있는 건 딸기 뿐이었다.
상대방이 내 사랑의 언어가 뭔지 깨닫고 나서 내가 원하는 사랑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는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사랑 결핍감을 해소하는 일에 훨씬 중요하다.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형태대로 사랑해주지 않더라도, 단지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 형태가 다를 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즉 내가 사랑받지 못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원하는 형태의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나는 그동안 진정어린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단지 내가 그동안 그걸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일 뿐.
그러면 이런 테스트가 상대방 사랑 언어에 내가 맞춰야 하는, 또는 정반대로 내 언어를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압력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 언어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때는 그 대상이 어린 아이인 경우다. 아이는 부모나 선생님 또는 가까운 어른 같은 보호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 언어를 상대방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기보다, 나와 다를 지라도 상대방의 사랑 언어를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진정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