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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Oct 02. 2023

그 많던 전복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누구인가? '주는 사람' vs. '받는 사람'

점저로 먹으려다가 아무도 밥 생각 없다해서 먹지 않은 게 찌개를 어머니가 싸 주었다. 전을 다 부치고 나서 어머니가 내게 게 찌개를 끓이라고 해서 내가 육수에 어머니가 손질해 놓은 재료를 넣었다. 어머니는 마지막에 소쿠리에 담아 놓은 전복을 넣으라고 당부했다. 전복이 크진 않았지만, 양이 꽤 많았다. 열댓 개는 되었다. 


뒤늦게 온 서방님만 게 찌개를 먹었다. "전복이 있네." 서방님도 전복을 먹어야겠다는 듯한 감탄사를 하며 찌개를 떴다. 부엌일이 끝나 나는 거실 소파에서 아버님과 얘기를 나눴고, 서방님과 함께 부엌에 있던 어머니와 동서가 서방님이 밥을 다 먹고 난 뒤, 게 찌개와 전 등을 쌌다. 내가 식탁에 갔을 때 어머니는 내가 가져갈 게 찌개를 이미 담아놓고는 내게 말했다. 우린 게 다리를 먹지 않아 너희꺼에 다 넣었다고. 네, 저희가 먹을게요. 기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침으로 먹으려고 찌개를 냄비에 옮겨 담다가 전복이 한 개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설마, 밑에 깔렸나? 없다. 그 많은 전복 중에 딱 한 개 들어 있었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 많던 전복의 행방은 쉽게 추측되고도 남는다. 아마도 거의 다 동서네로 갔을 것이다. 오지 않은 손녀 먹으라고. 


어머니의 유일한 손자손인 조카는 어머니의 상전 중 상전이다. 음식과 기도로 자기 애정을 쏟는 어머니는 자신이 마련한 음식 배분에 언제나 나름의 계획이 있다. 어떤 건 누구에게, 더 많이 주는 식이다. 그건 어머니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식에서 귀하고 맛있고 보기 좋은 건 언제나 손녀 몫이다. 


그러니 우리 냄비에 전복이 한 개 밖에 없다면, 나머지는 동서네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당연하다. 동서네 용기에 전복이 더 많을 거라는 건 나도 너무 잘 알고 있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 냄비에 전복 하나는 너무하단 생각도 떨치려야 떨칠 수가 없다. 그래도 입이 두 개인데, 하나라니. 


서운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전복이 두 개 있었다 해도 나는 먹지 않는다. 게에 그닥 관심 없어 시댁에서 게 찌개를 먹어도 나는 주로 무와 파 같은 야채만 골라 먹는다. 집에서까지 굳이 내가 게 찌개를 먹을 이유가 없다. 전복을 못 먹어서가 아니라 어머니 마음씀이 확인되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넋두리를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전복 욕심이 아니라 어머니 사랑 욕심이다(전복은 곧 어머니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이니까). 누군가에게 받은 게 아쉽다면, 언제나 되짚어보아야 한다. 나는 그만큼 그에게 주었는가? 


나는 솔직히 어머니에게 잘 하는 게 없다. 가끔 반찬을 해 드려도 워낙 음식에 프라이드 있는 분이어서인지 시큰둥해 하는 것 같아 음식을 해 가지도 않고, 신랑이 갈 때마다 따라가서 잘 찾아 뵙지도 않으며(물론 신랑이 날 따돌려서 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자주하는 스탈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드리지도 않는다. 용돈을 드리지도 않는다. 또, 동서처럼 귀하디 귀한 손주를 낳은 것도 아니다. 물론 손주에 대해서만큼은 어머니가 내게 아쉬워할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어머니 입장에서 귀하디 귀한 손주는 서방님네가 안겨 준 게 현실이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어머니에게 예쁨 받을 만한 건 시댁에 마음을 활짝 연 것, 그래서 완전한 가족처럼 격의 없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 뿐이다. 


사실을 따져보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정신줄을 놓는 바람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습관적인 욕심에 휘둘리고 말았구나. 더구나 나는, 특히 시댁에서는, 내 정체성을 '주는 사람'으로 삼는다. 내가 시댁에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계기는 받기 보다 '주는 사람'이 되기로 한 결심이 결정적이었다. 시댁 식구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그들에게 위축되는 가장 큰 원인은 주기보다 받으려고 하는 욕심이다. 물질적인 것이든, 노동처럼 육체와 관련한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내가 얼마나 (대접) 받는가보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주는가에 포커스를 맞추면,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자연스레 열린다. 이제 어머니가 편해져서 인지, 나도 모르게 다시 내가 얼마나 받는가에 무게를 두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다. 


전복 한 개로 어머니가 내게 죽비를 내리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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