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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문화

개인주의가 도덕이다

by 홍주현

어느 개그맨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식당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평소 말이 많고 활달한 성격인 그는 친한 사람들과의 수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좀 소란스러울 정도로 왁자지껄 웃고 떠들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한 여성이 그들을 향해 격앙된 목소리로 ‘저기요!’라고 외쳤고, 눈치 빠른 그가 개그맨 특유의 재치있는 말투로 ‘아, 저희가 너무 시끄럽죠’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금세 목소리 톤을 낮추며 ‘아웅, 네~’라고 해 불미스러운 일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식당 같은 곳에서 좀 시끄럽게 굴면 한국에서는 대뜸 ‘거, 좀 조용히 합시다! 여기 전세 냈어욧?’라며 버럭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나 비행기에서 등받이 문제 등 따위로 불편을 겪을 때도 비슷하다. 자신의 불편함을 대뜸 화내고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항의한다. 한국인은 이런 반응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미국이나 영국 또는 유럽이나 일본 같은 다른 문화권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결코 당연한 태도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곳에서는 대개 직원에게 중재를 요청해 직접 부딪히는 걸 피하고, 직접 항의하더라도 “Could you please’나 ‘스마마셍’처럼 정중한 표현을 덧붙여 부탁하는 방식으로 얘기한다. 유럽에서는 심지어 식당 음식이 형편 없어도 요리사나 직원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공격적으로 반응하면 도리어 더 나쁜 서비스를 받거나 쫓겨니기도 한다고 한다. 불만이 있다고 해서 낯선 사람에게 거칠게 항의하는 행동 자체를 매우 무례한 태도로 여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행동으로 불쾌하더라도 그 불만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면, 상대방 기분이 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반발할 가능성이 커진다. 식당이나 버스 또는 비행기 같은 곳에서 발생하는 다툼은 바로 이런 '태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등받이를 뒤로 젖히는 게 옳으냐 아니냐를 두고 소모적 논쟁이 일어난다. 자기 요구와 의사를 표현하는 매너를 갖추면 될 일인데, 그러지 못해 특정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고, 그러다보니 점점 하지 말아야 행동이 많아져, 가랑비에 옷젖듯, 결국 사회 전체가 더 많은 규범으로 통제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공격적인 항의를 받으면, 잘못을 했어도 기분이 나쁜 건 왜 그럴까? 그 거친 태도가 나를 이미 나쁜 사람으로 규정해버렸다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에게 윽박지르고 화 내는 건 그가 잘못된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이 악의에서 비롯됐다고 단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반응이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나와 친밀하지 않은, 낯선 타인이 에티켓이나 규범을 지키지 않을 때, 그를 곧바로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이 심리적·문화적으로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불신은 잠재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부정적 기대와 연결되고, 그것은 또다시 “저 사람이 일부러 피해를 주려한다”는 동기 해석으로 이어져, 거칠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런 낯선 타인이, 게다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까지 하는데, 그에게 정중하게 부탁하는 태도를 갖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불신 문화에서는 문제와 갈등을 민간 차원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정치권과 정부기관, 법원이 아무리 못 미덥다해도, 그래도 공적 기관이니 그들의 개입이 낯선 타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미권이나 유럽, 일본 같은 곳에서는 에티켓이나 규범을 지키지 않는 낯선 타인에게 어떻게 정중할 수 있는 것일까?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개인주의 영향도 적지 않다.


개인주의 문화는 내가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모든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내적 표상을 갖게 한다. 즉, 집단이나 배경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는 개인주의적 인간관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그런 인간 보편에 대한 본질적 관점이 생기기 어렵다. 집단주의적 인식은 인간을 그가 속한 집단, 인종이나 출신 등 타고난 배경 또는 경력 같은 외적 조건 등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배경을 벗겨낸 인간 본질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출신과 배경, 외적 조건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틀이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이 모든 외적 조건을 벗어내고 인간 본질을 향하게 한다. 물론 이런 관점은 자기에 대해서 먼저 출발한다. 자신의 선함과 악함, 불완전성과 의지 등을 자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제 그는 똑같은 성질을 타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중요치 않다. 그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근본적 인간성을 인식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타인에게, 모든 인간에게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신뢰 사회는 인간을 긍정한다. 인간의 본질을 긍정하고 존중하기에 불편을 끼치는 낯선 타인에게도 정중할 수 있다. 그 역시 나처럼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때로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제본소] 영화로운 개인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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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간 <영화로운 개인>의 본문 일부가 아니지만, 서문의 중심 주장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서문에서는 다른 문화적 현상을 다루고, 2장과 4장에서는 제가 겪은 이야기로 다른 문제점을 이야기합니다.

신간 <영화로운 개인>은 15편의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제 이야기를 통해,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받는 개인주의가 사실은 '도덕' 그 자체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함으로써 '개인'으로 성장하는 실천적 과정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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