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유물론자들이다. 인간이 환경을 만들기보다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힘이 더 크고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법 제도 정치권력이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원인으로 작용한다. 주민이 모여 논의하거나 바꾼 부분을 체계적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주민을 바꾸기 위한 원인으로 삼는 것이다.
그 덕에 근대 제도를 수입한 한국이 빠른 시간 안에 어엿한 근대 국가 모습을 갖출 수 있었지만, 대신 법리가 민심과 동떨어져 있으며 실생활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형식적 법 제도가 많다. 또한, 정치인을 욕하고 폄하하면서도 뭐든 문제만 생기면 법대로 해~ 정치인은 뭐하고 있냐~고 정치권력에 의지하며 정치인을 왕이나 사대부 양반 같은 리더로 여기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치 시스템은 유권자를 팔로잉하게 돼 있는데 유권자는 정치가 자신들을 바꾸고 사회를 이끌길 요구한다.
내가 실제로 바꿀 수 있는 부분, 내가 바뀌는 실질적 방법보다 거대 담론에 더 이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위성에 입각해 법 제도 같은 거대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이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법 제도에 의해 사회가 바뀌는 게 아니라 그 사회구성원이 바껴서 법 제도가 바뀌는 방식은 쉽게 이루지는 일이 아니다. 법 제도로 인간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일보다 훨씬 더디다. 많은 갈등과 실패 과정을 겪어야 한다. 혁명이 늘 법 제도를 바꾸는 직접적 힘을 가진 대상을 공격하면서 이루어지는 이유다. 즉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혁명이 대부분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 제도의 힘으로 사람들 태도와 생각을 바꾸(개조 또는 계몽)려고 하는 한 그 사회구성원이 그 법 제도의 주체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사회의 주인도 되지 못한다. 자기가 사는 곳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자가 과연 자기 삶에서는 주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