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생활 역사서!
최근 발간된 재미있는 역사책, "우리는 투기의 민족입니다"의 추천사를 쓰다 너무 분량이 넘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간소한 추천사를 보내긴 했지만, 길게 쓴 글이 너무 아쉬워 브런치에 올려 봅니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 문명이 뒤떨어져서 한양에서 몇십 리만 떨어져도 원시 사회다. 그러니 벼슬에 올라 권세를 날릴 때는 그리 좋지 않은 셋집을 구해 초연하게 살아야 하지만, 벼슬에서 쫓겨난 다음에는 어떻게든 한양 근처에 살면서 문화(文華)의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 (중략)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아직은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하고 있다만, 앞으로의 계획인즉 한양에서 10리 안에 살게 하겠다.
놀랍게 이 말을 한 이는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이 벼슬길에서 쫓겨나 살던 곳이 지금의 남양주 다산 신도시 근처죠. 책의 내용을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한양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28년(세종 10년) 한양의 인구가 10만 937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783년(정조 7년)이 되면 20만 7265명까지 늘어난다. 이미 세종 때 한양 주변을 성저십리라고 불렀는데, 요즘 말로 하면 수도권 신도시 정도가 될 것이다.
이 결과 당연히 한양의 땅값도 비쌌다고 합니다. 한양에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집값이 떨어질리는 없겠죠?
1533년 중종은 세자빈의 어머니가 가난해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세 들어 사는 게 너무 안쓰럽다며 집 사라고 국고를 털어 면포 10동同을 보내줬다. (중략) 면포 한 동은 50필로, 10동은 무려 500필이다. 조선 시대의 물가가 오락가락해서 이게 오늘날 딱 얼마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10억 원 정도다. 당시 영의정 연봉의 2.5배로, 평범한 백성 100명의 1년 치 생활비였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한양에서 고래 등만 하지는 않더라도 준수한 집을 살 수 있었다.
2021년 기준으로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이 10억원이니, 옛날에도 한양의 집값은 정말 비쌌군요.
그럼 왜 조선 사람들은 한양으로 몰려 들었을까요? 정약용이 이야기한 문화 생활 때문에? 그 보다는 출세에 꼭 필요한 과거 시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한양에 사는 게 과거를 치르는 데도 매우 유리했다. 과거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말을 타든 걸어가든 곧장 가서 보면 되고, 취소되더라도 그냥 집에 가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큰일이었다. (중략) 한양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며 비쌌다. (중략) 한양까지 간 뒤 머물며 먹고 자는 데도 돈이 꽤 들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렇게 해서 한 번 과거를 볼 때마다 30~40냥이 그냥 깨졌다. 이는 당시 4인 가족의 1년 생활비에 맞먹는 비용이었다. (중략) 오늘날의 입시가 그러하듯이, 과거에도 전략이 필요했다. ‘어느 책에서 문제가 나온다더라’, ‘언제 치른다더라’ 같은 정보들은, 설사 그것이 뜬소문일지라도 한양에 살아야 빨리 접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금방 임용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합격자의 숫자는 늘어가지만, 벼슬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임용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절실히 필요했답니다.
임용되기 전까지 유예 기간이 몹시 길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과거에 합격한 지방 선비) 김참봉은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한양에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다. 이번에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양의 유력자들에게 선물을 갖다 바치며 좋은 인상을 심으려고도 했다. 그러자 정말로 김참봉이 곧 관직을 받으리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또 다시 서둘러 한양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참 억울한 상황이었다. 과거까지 급제했는데 가난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으니까. ‘이건 다 한양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공부를 했을 때는 여력이 없었다지만, 급제한 이후부터라도 한양에 살았더라면 뭐든 것이 쉽게 풀리지 않았을까.’ 분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4년을 흘려보내야 했다.
결국 김창봉은 벼슬길에 나서지만, 이내 접고 고향으로 내려 갑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과거에 급제한 데다, 늙은 뒤에야 벼슬길에 나선 탓에 고위직에 올라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책 읽으면 김창봉의 앞길에 광영이 비추기를 기대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결말에 실망한 것은 제가 지방 출신의 흙수저이기 때문이겠죠. ㅎ
역사 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이들의 분투기를 읽노라면, 세상사는 게 예전이나 지금이다 비슷하다는 생각 들고 또 옛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배울 점도 발견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이, 그리고 저처럼 경제와 재테크에 관심 많은 분들에게 최고의 선택이 될 책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