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인상 및 예금금리 자유화, 한일 국교정상화 계기로 외자도입↑
1996년에 발간된 책 "해방 이후 한국의 금융정책"에 대한 두 번째 서평입니다. 지난 시간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강대한 경제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설명했는데, 이번에는 박정희 정부의 금융 시스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이전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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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강대한 금융 권력을 잡고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60년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책 39쪽에 나와 있는 <표 2-5>는 516 쿠데타 이후 큰 충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1962년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화폐개혁의 대실패 이후 은행 예금이 급격히 줄어든 것을 발견할 수 있죠.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재원이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재원인 은행 예금이 소멸한 것입니다.
이렇게 엉망진창의 상황에서 은행, 특히 산업은행 등 특수은행의 대출은 꾸준히 늘어납니다. 대체 이게 어찌 가능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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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의혹사건에 화폐개혁 실패까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부패한 데다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은행의 대출은 꾸준히 늘어나 경제의 성장을 뒷받침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환율의 대규모 평가절하로 수출 경쟁력이 개선되었다는 것입니다만, 대출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1963년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권력을 동원한 것이지만, 박정희 정부가 '금리현실화 조치'를 단행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채 등 사금융 시장에 있던 돈을 은행으로 되돌아 오게 만든 것은 큰 효과를 거두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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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한정 통화증발을 통해 '공공부문 주도의 자금 공급'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1965년 이전가지 지속적으로 높은 인플레가 발생했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즉 국민들은 정부가 세금을 걷은 것 이상의 돈을 쓰고 있고, 이는 결국 한국은행이 윤전기를 돌린 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따라서 언제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는 은행 예금으로 돈을 굴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금 여력이 있는 이들은 죄다 사채로 자금을 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5년을 고비로 인플레가 잡힙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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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답은 바로 정부가 1965년 IMF와 대기성 차관 협정을 맺은 데 있습니다. 물론 금액은 매우 적었습니다만, 협정 체결을 고비로 IMF가 지정하는 규제 대상 지표에 의거해 재정안정계획을 수립/집행하지 앟으면 안된 데 있습니다. 여기에 금리 자유화 조치가 부분적으로 시행되면서 은행 예금의 매력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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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60년대 후반에는 은행의 일반 금융이 정책금융을 넘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는 외자의 도입이 커진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습니다. 1961년 7월의 외자 촉진법 개정 이후, 외자 도입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67년부터 해외부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해, 1973년에는 전체 조달 예금의 14.3%를 외자가 차지하게 되었죠(책 55쪽).
1966년 8월 정부는 외자도입법을 제정하여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외자도입관계법규를 일원화하고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1967년 5월에는 보유외화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하여 외화대출취급규정을 제정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외자도입합리화를 위한 종합시책을 수립하였다.
이 시책이 수립됨으로서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 등 금융기관은 일괄차관에 의한 외화전대를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7년에는 외국은행이 국내에 지점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외자의 조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1967년 4월에는 한국개발금융주식회사(KDFC)가 설립되었다. 이는 여타금융기관과는 달리 IBRD 차관자금을 주재원으로 하여 중장기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민간개발금융기관이다.
물론 이 책에는 안 적혀 있지만, 한일 국교 정상화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