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을 일으킨 것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였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에 대한 4번째 서평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1929년 대공황 당시에 벌어진 일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혹시 이전에 올린 서평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돈의 발명 이야기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2- 골드버그 이야기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3 - 유통되는 화폐가 8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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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서평에서 미국에는 수 천개의 은행들이 제각각 화폐를 발행하다 1965년 국법은행 제도가 설립됨으로써 화폐의 혼란이 가라앉았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수 천 아니 수 만개의 은행이 난립하고 영세함으로써 발생하는 주기적인 금융위기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죠.
특히 1929년 발생한 대공황으로 세계경제가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졌을 때, 문제가 심각해졌죠(176쪽)
(대공황이 유발한 경제 충격 속에 부실 차주들에게 돈을 빌려준) 유럽과 북미의 은행들이 쓰러졌다. 당시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사람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고 앞다퉈 영국 파운드화를 금으로 교환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잉글랜드 은행은 자신들 외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을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부유층은 영국의 상황을 지켜봤고 '맙소사! 영국이 자신들이 만든 금본위제도를 포기했어! 미국도 곧 영국의 뒤를 따를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대다수 미국인도 서둘러 달러화를 금으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은행이 파운드화와 금의 교환을 중단하고 5주가 지났을 무렵, 미국인은 연방준비은행에서 7억 5,000만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갔다.
연방준비은행은 이러한 금 유출 사태를 막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연방준비은행은 금리를 인상했다. 금리가 인상되면 사람들은 돈을 금으로 교환하는 대신에 돈을 은행에 맡겨서 더 큰 수익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금리 인상은 효과적이었다. 금리가 인상되자 사람들은 돈을 금으로 교환하길 중단했다.
하지만 금리 인상 역시 의도치 않은 하지만 예측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 농가와 기업에서는 대출에 대해 높은 이자를 물어야만 했고 파산하는 농가와 기업이 증가했다. 이로 인해 실업률은 더욱 악화됐고 물가는 더욱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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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란, 보유한 금만큼의 지폐를 발행하는 제도죠. 그리고 고객이 지폐를 가지고 은행을 방문하면, 일정 비율로 금을 교환해주는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은행의 대출이 부실해졌고 고객들이 금을 교환해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뱅크런이 발생하며, 은행들은 고객에게 예금을 돌려주기 위해 기업이나 가계에 빌려준 돈을 회수해야 합니다. 갑자기 대출 회수를 통보 받은 기업이나 가계가 파산하면서, 다시 은행의 부실 여신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죠.
경제 전체에 강력한 악순환이 발생했을 때에는 금리 인하 및 재정 지출 확대 등의 특히 경기가 급격히 악화되는 중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했으니, 대출의 부실화는 더욱 심화되었죠(177쪽).
연방준비은행은 오히려 금리를 인하했어야 했다. 오늘날 연방준비은행은 거의 모든 사람이 고용되고 물가가 빠르게 오르는 시기에 경기가 과열되면 금리를 인상한다. 반대로 경기가 위축되면 금리를 인하한다. 1931년 가을, 연방준비은행은 금리 인상을 통해 지난 2년 동안 경기 위축으로 빈사 직전에 내몰렸던 경제의 목줄을 한껏 더 졸라버린 꼴이었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모두가 아는 규칙대로 금리 인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금본위제도를 근거로 결정한 조치였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 뒤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과 안나 슈워츠 Anna Schwartz 는 미국의 화폐 역사에 관한 사료를 수집했다. 두 사람은 소위 금본위제도의 규칙에 따라 통화량을 줄이고 금리를 인상시킨 연방준비은행의 정책이 심각하지만 평범한 경기 침체를 대재앙으로 바꾸었음을 증명했다. 결국 연방준비은행과 금본위제도가 대공황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 금본위제도는 몇몇 사람이 향수에 젖어 회상하는 옛것이 됐다. 정치인들은 때때로 금본위제도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하지만 금본위제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장이 재앙으로 이어질 것임을 알고 있다. 2012년 미국에서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금본위제도에 관한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경제학자 39명이 금본위제도로의 회귀에 반대했다. 금본위제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에게 금본위제도는 논쟁거리도 안 된다. 거의 모든 학자가 금본위제도는 끔찍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림> 대공황을 전후한 미국 단기금리 추이 - 1932년 금리인상!
https://fred.stlouisfed.org/graph/?g=Yo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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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이 대공황을 일으켰다는 지적이 연준을 바꾸었죠. 이후 연준은 과단성 있는 정책을 시행하기로 아주 유명합니다. 가장 단적인 예가 2022년으로, 인플레 압력이 통제 범위를 넘어섰다고 느껴지자 1년 만에 무려 4.5% 포인트의 금리인상을 단행해 인플레 압력을 박살 낸바 있습니다. 반대로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인하하는 한편, 대규모 양적완화를 단행해 경기를 살린바 있죠.
결국 1929년 대공황 당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영국처럼 금본위제를 신속하게 폐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후버는 금본위제에 대해 아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죠(178쪽)
1932년, 물가 하락과 실업률 상승이 3년 동안 지속되고 모자를 쓴 남자들은 빵을 얻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여자들은 허름한 판잣집에서 깡마른 어린아이를 달랬다. 그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허버트 클라크 후버 Herhern Clark Hoover 대통령은 여전히 금본위제도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제로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미국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인류가 이미 경험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며, 통화와 채권이 한낱 휴지조각이 될 테니 정부의 도덕성이 희생될 것입니다.”
반면 그의 경쟁 후보인 루스벨트는 '건전 화폐'를 약속했다. 전통적으로 금본위제도의 연관어인 건전 화폐는 화폐로서의 가치나 지불수단으로 통용되는 힘이 안정된 화폐를 말한다. 그는 건전 화폐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자신의 통화 정책을 분명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통화 위기 속에서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통화 정책이 무엇인지 밝히지도 않고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했다. 지금까지 상황을 놓고 봤을 때 그 역시 어떤 통화 정책을 펼쳐야 할지 본인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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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경제위기에 아무도 제대로 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죠(어쩌면 히틀러가 본능적으로 그 답을 알아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루즈벨트는 은행파산 및 대공황에 대한 책임이 없었기에.. 좌충우돌하기는 했지만 어떤 대응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181쪽).
취임 선서에서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뱅크런 사태에 대해 완벽에 가까운 말을 남겼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두려움 그 자체다."
그의 말은 그야말로 자기 충족적 예언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뱅크런 사태가 벌어지는 가운데, 경제 상황을 대공황으로까지 몰고 간 본질적인 원인은 두려움 자체였다. (중략) 루스벨트는 서재에 앉아 상아로 된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미국 전역에 있는 모든 은행의 영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그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인생 2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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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이 얼마나 부실한지 검사하고, 부실한 은행은 폐쇄하고 건전한 은행은 살려주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시행되었던 '스트레스 테스트'의 루즈벨트 버전이라 하겠습니다. 다행히, 미국 국민들은 정부의 은행 휴일 이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더 나아가 금 본위제를 폐지함으로써, 불황에 대응할 수단. 즉 금리인하라는 강력한 수단을 확보하게 되었죠(183쪽).
"이 나라에서 유통되는 전체 통화량은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은행이 보유한 예치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2월 말과 3월 초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은행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무너져 일반 대중이 대거 은행 예금을 현금이나 금으로 교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은행으로 몰려와 돈을 인출한 까닭에 이 나라에서 가장 건전한 은행들조차도 자금이 부족했고 대규모 인출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연방 정부가 미국의 모든 은행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전한 은행들은 곧 영업을 개시할 것이고 대부분의 은행이 곧 영업을 개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그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뱅크런 사태의 원인이 되는 두려움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루스벨트는 말을 이어 갔다.
“여러분! 이 나라의 금융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데 화폐와 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민 여러분의 신뢰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두려움을 떨쳐 냅시다! 우리가 함께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사람들이 화폐라고 믿기 때문에 화폐라고 불리는 것이 화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은행권이 신뢰를 잃자, 사람들은 은행에 맡긴 예금을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다퉈 예금을 인출하고 자신들의 돈을 지폐의 형태로 보관하기를 원했다.
마지막 대목이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화폐는 금이나 비단 혹은 은과 같은 귀중한 사물에 의해 보증 받았기에 화폐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화폐라고 믿었기에 화폐로 불리는 것이죠. 즉 신용화폐가 이제 일반화될 것임을 시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행휴업이 끝난후 루즈벨트는 지체없이 금 본위제를 폐지함으로써, 기나긴 경기 불황을 종료 시킬 수 있었습니다(184쪽).
(은행휴업이 끝난후) 은행들이 차례로 영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두려워했고 물가는 하락했고 대출도 감소했다. 몇 주 뒤 루스벨트는 또다른 폭탄을 떨어뜨렸다. 행정 명령 6102호가 발동했다.
"지금부터 모든 국민은 1933년 5월 1일까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화, 금괴 그리고 금증서를 연방준비제도 Federal Reserve System, FED 소속 은행에 맡겨야 한다. 누구든지 의도적으로 이 행정 명령, 관련 규제나 규칙을 어길 시 10,000달러 이하의 벌금이나 10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둘 다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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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금본위제 폐지이후 기적처럼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187쪽).
수십 년 뒤에 경제사학자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되돌아보며 이 국가들 사이에서 명백한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정부가 금본위제도를 포기하자 차례대로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경제사학자들은 경제 위기와 금본위제도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금본위제도가 국가들을 끔찍한 경제적 순환 주기에 가뒀던 것이었다. 하지만 금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내자 끔찍한 순환 주기 역시 끊어졌다.
물론 이 뒤로도 금본위제가 생명을 이어가기는 했습니다. 1971년 닉슨쇼크가 발생해, "1온스=35달러"의 고정적인 교환비로 금을 교환해주는 약속이 깨지기 전까지는 형식적인 금본위제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금의 보유량이 줄어들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하는 등 이미 금본위제는 사망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림> 1950~1970년 미국의 금보유량 추이
1961~2021년 미국 통화 및 재정정책의 역사 2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