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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표 Jul 29. 2024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짙은 장미와 라일락의 향기로 가득한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의 화실. 화가 바질 홀워드는 아름다운 청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화가의 친구 헨리 워튼 경은 초상화 속 모델을 보고 감탄하며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것을 제안하지만, 그는 그 초상화에 '자신을 너무 많이 반영했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도리언 그레이라는 청년으로, 바질이 사교 모임에서 만나 첫눈에 반한(?) 인물이다. 곧 도리언이 모델을 서기 위해 화실에 방문하고 바질은 헨리에게 그를 소개해 준다. 헨리는 실제로 도리언을 만나고 나서 바질이 그를 흠모한 이유를 깨닫는다. 유미주의자이자 쾌락을 추구하는 헨리 경은, 바질이 초상화를 완성하는 동안 도리언에게 외면적 아름다움은 일시적일 뿐이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쇠퇴할 뿐이라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설교를 하고 도리언은 그 내용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날 바질이 초상화를 완성해 도리언에게 선물해 주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면 늙고 추해질 자신과 다르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그림에 질투를 느끼며 나 대신 그림이 늙어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마저 바치겠다고 울며 기도한다.


헨리와 교제하게 된 도리언은 그의 사상에 점점 빠져들고 타락해 간다. 어느 날,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감상하던 도리언은 줄리엣 역을 맡은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첫눈에 반한다. ‘시빌 베인’이라는 이름의 이 여배우와 도리언 그레이는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계획한다. 바질과 헨리에게 자신의 연인을 소개해 주기 위해 도리언은 둘을 그녀의 다른 연극에 데려간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의 연기는 형편없다. 도리언은 너무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잔인하게 이별을 통보한다. 다음 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시빌에게 사과하려고 하지만, 상처받은 그녀가 독약을 마셔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초상화가 추악하게 변해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도리언은 악행을 저지르고 방탕한 삶을 이어나가고, 그러면서 그의 평판 또한 나빠진다. 감춰 둔 초상화는 계속 비참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도리언의 미모는 여전히 변함없다. 어느 날 바질 홀워드가 그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를 찾아간다. 도리언은 감춰뒀던 초상화를 보여주고, 일그러진 그림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화가와 모델은 말다툼을 벌인다.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인 도리언은 바질을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처리한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으로 충격에 빠진 도리언은 선한 일로 자신의 악행을 덮어 보려고 노력도 해 보지만, 그의 초상화는 점점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가기만 한다. 이를 견디지 못한 그는 어느 날 칼로 그림을 찔러 버린다. 그의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하인들이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죽어있는 늙고 고약한 모습의 도리언 시체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 도리언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소설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빅토리아 시대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이다. 시인이자 작가였고, 평론가였으며, 유미주의의 전도사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영국 상류사회를 유쾌하게 꼬집어 풍자하고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출판되었던 당시 예술은 도덕과 비도덕을 넘어 예술성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그의 파격적인 주장과 소설이 가진 퇴폐적인 줄거리 탓에 많은 논란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도덕주의적 가치관과 규범에 적극 반항하던 그의 작품들은 자주 평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탐미주의에 입각한 오스카 와일드의 사상은 예술과 문학은 도덕적 목적이 아닌, 예술로써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표현상 특징에서도 드러난다. 자아 분열, 혼란, 광기 등의 특성이 있어 장르로서 고딕 환상 소설로 분류됨에도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서정적이고 자세한 배경 묘사로 이루어진다. 삶이 예술을 표방한다고 주장하고,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것이 예술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그의 주장에 걸맞은 전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특성은 1장에서 바질의 화실이 가지는 분위기와 여름의 색채를 설명할 때, 2장에서 헨리가 도리언을 처음 만난 장면에서 그의 외모를 설명할 때, 그리고 15장에서 사교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장신구, 외모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오스카 와일드의 반항적인 사상과 함께 그가 남긴 어록들 또한 유명하다. “To define is to limit, 정의하는 것은 한정 짓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그의 명언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온 말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에 정의를 부여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정의에 귀속, 즉 한정되게 된다. 필자는 무언가를 정의하거나 단정 짓는 일이 다소 위험한 일이라고 믿는다. 자신을 단정하면 본인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해 능력 발휘를 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기회 자체를 제약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특정 집단이나 정체성으로 정의하면 그 사람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보지 않고 그 특정한 이름으로 한정해서 보기 시작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본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쓸모로 가치가 평가되는 다른 모든 것들과는 다르게,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했던 작가는 선과 악, 전형적 형식으로 예술을 정의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서문에서 그가 주장했듯이 모든 예술은 전혀 쓸모없다. 쓸모없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이다. 그런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이를 찬양하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3명의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예술가를 대표하는 화가 바질 홀워드, 반항아와 사상가를 대표하는 인물인 헨리 워튼 경.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하는 미청년 도리언 그레이.

작가는 이 책을 집필한 후에 바질 홀워드는 그가 생각하는 그의 모습, 헨리 경은 세상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며, 도리언은 그 자신이 원하는 본인의 모습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캐릭터 모두 와일드의 일면이라고 볼 수도 있거나, 세 인물 사이에서 이루어 내는 일치가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삶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창조하는 자아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아 사이의 일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무대 위에 있던 도리언과 바질은 모두 죽고 만다. 이는 이 작품이 가지는 전개상의 특징으로 결국 이야기에서 독자와 헨리 경만 텅 빈 스크린을 응시하도록 남겨진다. 이렇듯 결말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냉소적인 현실의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유미 주의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예술 활동을 현대에서는 더 이상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사회는 예술성과 대중성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근거와 함께 창작자의 밥상을 걱정한다. 동시에 쾌락주의와 반사회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탐미주의 가치관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반론은 타당하다. 하지만 필자는 의미 없는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가지는 미추를 판별하고, 잘못된 규범에 창작으로써 저항하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와일드는 사회의 가치와 규범에서 완전히 독립된 예술을 꿈꾸었다. 예술과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반항하려 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보면, 예술은 신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서문에서 오스카 와일드가 한 주장을 조금 바꾸어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쓸모없는 신념을 믿는 것에 대해 유일하게 변명하는 길은 스스로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뿐이다. 모든 신념은 전혀 쓸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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