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질서 맞은편에 아직 비어 있는, 정해지지 않은, 공허한 구렁텅이가 세상을 품고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세상의 시작에는 분리와 균열과 공포가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의 시작에도 혼돈이 있었다. 책의 저자인 룰루 밀러는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뇌하던 중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다. 조던이 연구하던 ‘분류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체계에 맞춰 분류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학문으로 질서와 규칙에 관한 것이었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혼돈과 싸우는 일’처럼 보였다. 그는 조던의 삶 속에서 이 허무를 헤쳐 나갈 열쇠가 있지 않을까 소망하며 그의 업적을 조사하기로 한다.
어릴 적의 조던은 별을 구경하던 것을 좋아하고 식물을 수집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던 소년이었다. 청년이 된 그는 당대 유명한 박물학자였던 ‘루이 아가시'의 캠프에 참가해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제대로 된 순서로 배열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의 집착은 물고기를 대상으로 하기 시작했으며 그후 현대 인간이 아는 어류의 5분의 1을 명명하는 업적을 남기기까지 한다.
당시 조던의 목표는 무척 숭고한 것이었다.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분류하는 작업은 세상의 창조 의도를 밝혀내는 일과 같았고 ‘질서’가 주는 위안은 그 무엇보다도 큰 것 처럼 보였다. 허무함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조던의 삶은 저자에게 의아함마저 안겨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30년동안 모아 놓은 물고기 표본들을 모두 앗아간 1906년의 대지진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신념은 자기 기만에서 나온다. 그는 운명을 믿지 않았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의지'라는 주문을 마음 속에 지니고 살았다. 이런 그의 지나친 자기 기만과 자기애적 성향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폭력성으로 발산한다.
여기에서 반전이 등장한다. 세상의 물고기들을 분류한 영웅처럼 보이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반사회적 성향이다. 스탠퍼드 대학에 학장으로 있던 시절 그는 자신의 친구 찰리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목격자를 협박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제인 스탠퍼드 학장을 독살하였다는 혐의까지 받는다.
또한 그는 은퇴 후에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들에게 ‘품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우생학을 미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국에서는 불임 수술이나 처형이 자행되었다.
또다시 저자에게 혼란이 찾아온다. 결국 그가 영웅으로 여겨 삶의 지혜를 배우려 했던 인물은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그런 저자를 혼란에서 구한 것은 우생학의 피해자인 ‘메리'와 ‘아나'이다.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결국에는 불임수술을 당했음에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은 그들을 인터뷰하며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우생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 서로에게 그 삶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 우리는 중요하다!
아, 그 옛날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 인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인생을 빼앗긴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우리는 우주에서 한낱 먼지일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에 저항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처럼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발악했고, 어떤 사람은 삶에서 자신만의 이유를 찾아 내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그것도 아니라면 삶에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 앞에 놓여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키보드 앞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은 지금의 나처럼.
저자인 룰루 밀러의 의견은 어떨까. 저자는 이런 허무에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앞서 언급한 ‘민들레 법칙'을 제시한다. 민들레는 누군가에게 잡초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쓰임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서로를 연결하는 작은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 또한 아무 의미 없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다른 인간에게, 이 세상에 가지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무슨 뜻일까?
저자는 범주화를 비판하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 생애를 부정한다. 바로 생물학적인 분류로써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대 분기학자들은 그동안 어류라고 여겨져 왔던 생물들은 모두 포유류와 가깝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던은 그 생물의 복잡하고 섬세한 차이점을 무시하고 모두 어류라는 범주에 집어 넣어 버린 것이다. 모든 범주와 개념은 상상의 산물이므로, 우리는 그들을 의심해야 한다. 이름이나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편리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제한하고 귀속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름 부르는 것들이 모두 진실인가?’ 질문하는 태도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 책에서 어류라는 분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듯, 틀은 언제나 깨어질 수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과학적인 정보는 물론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소중하다’는 교훈도 전해 줘서 허무에 더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는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애정하는 책이다. 때문에 이 책이 가지는 전개상의 특징 또한 언급해 보고 싶다. 이 책은 처음에 저자가 혼란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서 질서에 대한 힌트를 찾아 가다가 그의 본모습을 발견하며 다시 혼란으로 빠지는 모습을 비춰준다. 그런 그에게 삶의 허무를 극복할 용기를 준 것은 우생학을 지지하던 조던이 ‘쓸모 없다'고 여길 인물인 우생학의 희생자였던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지켜 나가고 서로를 지켜 나가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