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 기념비의 웅장함과 살아 있는 대항해시대의 유산
벨렝 탑에서 조금 걸어가면 발견 기념비(Padrão dos Descobrimentos)가 모습을 드러낸다. 1960년, 항해왕 엔히크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이 53미터 높이의 기념비는 거대한 배의 뱃머리처럼 테주 강가에 우뚝 서 있다.
정면에는 엔히크 왕자가 당당히 서 있고, 그 뒤로 바스쿠 다 가마, 마젤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등 대항해시대의 인물들이 줄지어 있다. 지도 제작자와 시인, 그리고 유일한 여성인 필리파 랭커스터 왕비까지 포함된 이 군상은, 세계로 향한 포르투갈의 집단적 열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기념비 앞 광장에는 대항해시대의 항해술과 탐험정신을 상징하는 '바람의 장미' 대리석 모자이크 세계지도가 펼쳐져 있다. 그 위를 걸으며 1497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이곳에서 인도로 향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네 척의 배와 170명의 선원이 열 달 끝에 향신료를 싣고 돌아왔을 때, 유럽의 역사는 뒤바뀌었다. 아시아로 향하는 해상 루트가 현실이 되자 포르투갈은 반세기 동안 무역을 독점하며 유럽의 부를 주도했다.
전망대에 오르니 테주강과 제로니무스 수도원 너머 있는 리스본 시내, 붉게 빛나는 4. 25 다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테주강 건너 보이는 거대한 예수상은 두 팔을 벌린 채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견 기념비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도전과 용기, 그리고 그로 인해 뒤바뀐 역사를 증명하는 공간이었다. 테주강 앞에 선 저 거대한 돌로 만든 배는 지금도 출항을 재촉하듯,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벨렝을 걷다 보면, 대항해시대의 흔적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이 도시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박물관 유리 뒤에 갇힌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사람들의 식탁 위에 오르고, 거리에서 들리는 언어 속에 녹아 있으며, 한 택시 기사의 미소 속에서 마주치는 살아있는 현재였다.
1. 음식 속에 남은 항해의 기억
파스테이스 드 벨렝의 에그타르트를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커스터드가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18세기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남은 달걀 노른자로 만들기 시작한 이 과자는, 훗날 대서양을 건너 마카오에서 변형되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한 나라의 음식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빚어낸 작은 세계의 역사다.
리스본과 포르투의 식당에서 맛본 바칼라우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롭게도 포르투갈 연안에서는 대구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15세기부터 포르투갈 어부들은 대구를 찾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캐나다의 북대서양까지 원양어업을 나갔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배 위에서 잡은 대구를 즉시 소금에 절여 말렸다. 이 보존식품은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고아, 마카오로 퍼져나갔고, 각지에서 그 지역의 재료와 만나 변형되었다.
포르투의 한 식당에서 웨이터가 추천한 '바칼라우 고안'은 고아에서 발전한 요리가 다시 포르투갈로 역수입된 것이었다. 코코넛 밀크와 향신료가 어우러진 그 한 접시에는 노르웨이, 인도, 그리고 포르투갈이 함께 담겨 있었다.
2. 언어로 남은 제국, 그리고 한 택시기사
포르투갈 제국은 사라졌지만, 언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 등 세계 곳곳에서 약 2억 8천만 명이 포르투갈어로 대화한다. 특히 인구 2억의 브라질은 본국 포르투갈(인구 1천만)보다 20배 이상 크다. 식민지가 본국을 압도하는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이지만, 거리에서는 부족 언어들이 함께 들린다. 사람들은 집에서는 부족 언어를, 학교와 직장에서는 포르투갈어를 쓴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들끼리는 두 언어를 섞어 쓰며, 이렇게 탄생한 언어가 포르투갈어도 부족 언어도 아닌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포우사다 알파마 호텔 앞에서 볼트 택시를 불렀다. 5분 뒤 도착한 기사는 앙골라 출신의 60대 남성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지녔고, 짐을 실어주며 친절히 인사했다.
"언제 오셨어요?" "1980년대 초반이요. 앙골라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어요. 전쟁도 있었고요."
앙골라는 1975년 독립했지만 곧바로 내전에 휩싸였다. 27년간 계속된 내전으로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앙골라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옛 식민 본국인 포르투갈로 이주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가족은 함께 사세요?" "네, 자녀가 열한 명이에요." 그는 자랑스러운 듯 웃었다.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뭐, 해야죠. 가족이니까."
차가 리스본 공항을 향해 달렸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택시 운전으로 생활하시기 어렵지 않으세요?" "하루에 110유로 정도 벌어요. 기름값, 차량 유지비, 앱 수수료 빼면... 남는 건 20유로 정도죠."
공항에 도착해 요금 이외에 미리 준비한 팁 10유로를 건네자 그는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오브리가두. 무이투 오브리가두." 그의 눈이 순간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포르투갈의 역사와 현재가 겹쳐 보였다. 식민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리스본의 거리와 사람들 속에 남아 있었다. 대항해시대는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택시 안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3. 총이 아닌 꽃으로
벨렝의 강변에서 보이는 붉은 철골의 다리 이름은 원래 '살라자르 다리'였다. 1932년부터 1968년까지 포르투갈을 독재한 안토니우 살라자르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 전 세계가 탈식민화의 물결에 휩싸였을 때도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앙골라, 모잠비크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징집해 아프리카 정글로 보냈다. 13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포르투갈 경제는 짓눌렸고, 국민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1974년 4월 25일 새벽, 라디오에서 조제 아폰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것이 혁명의 신호였다.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총구에 카네이션 꽃을 꽂고 거리로 나왔다. 시민들이 환호하며 군인들에게 꽃을 건넸다. 붉은 카네이션이 리스본의 거리를 가득 채웠다.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독재는 무너졌다.
다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장면이 눈에 어른거리며 마음이 아려왔다.
혁명 정부는 즉시 식민지 전쟁을 중단했다. 1975년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앙골라가 차례로 독립을 선언했다. 대항해시대 이후 500년 동안 이어진 포르투갈 제국이 그렇게 끝났다. 폭력적인 전쟁도, 국제적인 압력도 아니었다. 포르투갈 사람들 스스로가 제국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오랜 세월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세운 제국은 그렇게 스스로의 식민지를 놓아주었다. 바다의 끝에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은 더 넓은 땅이 아니라, 자유의 의미였다. 살라자르 다리는 '4월 25일 다리'로 이름이 바뀌었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그날을 '자유의 날'로 기념한다. 예전에 단순히 날짜를 의미하는 이름인 줄 알았는데 카네이션 혁명의 날, 그러니까 포르투갈이 스스로의 운명을 바꾼 날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직접 마주한 다리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총구에 꽂힌 붉은 카네이션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혁명의 기억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4. 바다의 민족이 남긴 것
포르투갈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들을 '바다의 민족'이라 부른다. 타문화에 대한 포용,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그들의 성격 속에 녹아 있다. 그 감정을 그들은 '사우다드'라 부른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이자, 여전히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마음이다.
벨렝에서 하루를 보내며 생각했다. 이곳은 과거의 유적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으로 세계를 하나로 잇기 시작한 자리다. 500년 전 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항해자들의 마지막 정박지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다가 향기를 품은 도시.
바람이 불고, 강물이 잔잔히 흐르는 그 풍경 속에서 느꼈다. 포르투갈의 유산은 박물관의 유리 안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의 삶 속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